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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예가 안진경(顔眞卿)은 누구인가?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7. 8. 3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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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경(顔眞卿)

三和堂

안진경의 서법예술(書法藝術)은 당시 중국서예발전에 엄청난 공헌과 함께,

세계적으로도 그 영향은 혁신적인 서예법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의 서예시작의 근본 바탕이 되었던 안진경에 대해
간단히 기술해보고,
현재 서예를 하는이들에게 또는 처음 라는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술한다,
안진경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2년(724년) 에 진사에 합격,
현종(玄宗), 숙종(肅宗), 대종(代宗), 덕종(德宗)에 이르는 4대에 걸쳐 벼슬을하였고,

낭관(郎官)에서부터 시작하여 절도사(節度使)·상서(尙書)를 거쳐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올랐던 당나라의 중요한 관리이기도 하였다.
안진경은 정치상으로는 중앙집권과 전국 통일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당시 안녹산(安祿山)과 이희열(李希烈)의 반란에 완강히 대항하여, 마침내 이로 인해 순국까지 한 애국 충신이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안진경이 남긴 서예작품은 매우 많은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약 70여 점이 된다.

또한 지금까지 유전되고 있는 비각과 탁본 또는 진적도 적지 않으며,
이것들은 모두 이미 국내외의 인사들에게 귀중한 역사적인 문물로 취급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하여 안진경의 서예를 크게 전기, 중기, 후기의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안진경의 나이 50세(758년) 이전이 전기작품 시기에 속한다.

이시기는 안진경이 옛사람의 필법과 민간에서 유행하는 서예를 소화하고 흡수하는 단계로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그의 나이 44세에 쓴 해서

<천복사다보탑비(千福寺多寶塔碑)>와
46세에 쓴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이 있다.
<천복사다보탑비(千福寺多寶塔碑)는 필법에서부터 결구에 이르는 모든 것이
수, 당 시대에 민간에서 유행하였던 글씨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에 비하여 후자는 왕희지가 쓴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을 본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글들을 읽어보게 되면 안진경은 폭넓게 배워서 그것들의 장점을 모두 모아 하나의 용광로에 녹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안진경의 나이 50세에서 60세에 이르는 기간 (758년 ~ 768년)을 중기 작품 시기라 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그의 나이 54세에 쓴 해서 <선우씨이퇴기(鮮于氏離堆記)>와 56세에 쓴 <증태보곽경지묘비(贈太保郭敬之廟碑)>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강건하면서 웅후한 기풍과 기세가 당당한 풍격을 이미 형성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 시기의 명작으로 사람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나이 50 세에 행서로 쓴 <제질문(祭姪文)>과 56세에 쓴 <쟁좌위첩(爭座位帖)> 그리고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서풍으로 보아 앞의 것

보다는 조금 전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유중사첩(劉中使帖)>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서작품은 모두 특정한 정치 상황 아래서 작자의 강렬한 감정을 폭발시켜 충만된 정력으로 단숨에 써서 완성한 것들이다.
안진경이 60세에 쓴 <안근례비(顔勤禮碑)>는 그의 서예가 완전히 성숙하는
후기로 들어가는 표준적인 작품이다.
이 시기에 쓰여진 명작은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를 들면,

그의 나이 63세에 쓴 <대자마고선단기(大字麻姑仙壇記)>와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이 있으며,
64세 쓴 <우승상송경비(右丞相宋璟碑)>와 <팔관재회보덕기(八關齋會報德記)>가 있고,
68세에 쓴 <현정선생이함광비(玄靖先生李含光碑)>,
2세에 쓴 <안유정가묘비(顔惟貞家廟碑)> 등이 있다.

안진경의 예술생명은 매우 길었으며 가면 갈수록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발전하다가 마침내 후기에 들어와서 고도의 미학 가치를 지니면서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고있는 이른바 안체(顔體)라는 것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안체(顔體)는 동진 이래로 서단을 점유하고 있던 왕희지 부자
우세남·저수량 등을 대표로 하는 소위 <남파(南派)>에 대하여 필법은
물론 결구와 포치 그리고 묵법 등 각 방면에 대하여 거대한 돌파와 혁신을 하였던 것이다.
필법상에 있어서 <남파>는 글씨가 가벼우면서도 수려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손가락을 운용하는 곳이 비교적 많다
 이에 반해서 안진경이 발전시킨 것은 여기에다 더욱 강한 팔의 힘을 가한 것이다.
그리고 교묘하게 장봉과 중봉을 운용하여 <잠두연미(蠶頭燕尾)>라는 필획의 특징을 나타내어 분명히 종이의 뒤를 뚫는 듯한 강한 필력을 드러나게 하였다

필법상 또 하나의 특징은 가로획은 가볍고 세로획은 무겁게 하여 모든 글자들이 모두 육중하면서도 입체감이 나도록 한 점이다.

결구상에 있어서 <남파>의 서예가들은 모두 왼쪽을 긴밀하게 하고 오른쪽을 넓게 하여 오른쪽 어깨가 약간 들리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것은 전체의 자형(字形)을 조금 옆으로 쏠리게 하여 영활하고 교묘하면서도 소쇄한 풍격과 자태를 나타내려고 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진경은 기울고 쏠리는 짜임새를 고치고 변하여 비교적 단정하면서
평평한 필획을 사용하여 좌우가 기본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글자마다 모두 정면을 쳐다보는 형상을 함으로써 더욱 장중하고 정대한 기풍을 갖추게 하였다.

이러한 결구는 분명히 고대 전서나 예서가 정면으로부터 형세를 취하는 것을 흡수한 필법으로 당시 이러한 필법을 해서에 운영한다는 것은 확실히 오랫동안 내려온 인습을 타파하는 일종의 혁신이라고 볼 수 있다.
<안체>에 있어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좌우로 내리긋는 획의 중심이 안을 구심점으로 하여 약간 타원형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남파>의 해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좌우로 세우는 획을 쓸 때 둥글게 휜 모양은 약간의 타원형 형태를 이루며, 거기에서는 자연히 강한 탄력이 넘쳐흐른다.
안진경이 사용한 필법, 즉 약간 휘면서 좌우로 세우는 획도 결국 결구상에 있어서 글자 전체의 모양을 더욱 둥글고 두텁게 함으로써 안으로 강한 힘을 응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포치면에 있어서 <남파>의 글씨는 일반적으로 행간의 거리와 자간의 간격이 비교적 크고 넓어서 고요하면서도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이에 반하여 <안체>는 행간과 자간의 간격을 되도록 긴밀하게 한다.
또한 <남파>의 글씨처럼 비교적 소자(小字)를 위주로 하지 않고 대자와 소자가
모두 있게 할 뿐 아니라, 이것을 쓸 때에도 시원하면서도 웅장하게 하여 전체의

포치에 충실하고 조밀한 느낌이 나도록 하고, 또한 글자의 행간에서도 팽배한 기세가 나타나도록 하였다.
먹을 쓰는 방법에 있어서 <남파>는 해서나 초서를 막론하고 모두가 화려하고
수려하면서도 매끄러운 것을 추구하는 반면에 안체는 진하고 매끄러운 것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행초를 쓸 때에는 간간이 갈필도 구사하여 호매한 기상을 나타내었다.
안진경 후기의 대표작으로는 <대자마고선단기(大字麻姑仙壇記)>와 <안유정가묘비(顔惟貞家廟碑)>가 있다.
이 두 작품은 또한 안진경 해서를 대표함과 아울러 <안체>의 독창성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것으로, 서예사에 있어서 고도의 성숙미와 완정미를 보여주고 있다.

안체가 후세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안진경 이후에 출현한 당나라의 서예가 유공권은 바로 이 안체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창작을 하였다.
송나라 4대가 중에서 황정견, 그리고 채양 등은 모두 이 안체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인 미불은 비록 안체에 대하여 불합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도 <쟁좌위첩>을 좋아하여 진지하게 임모를 하였다.
송나라 이후 안진경의 글씨는 가면 갈수록 더욱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각 시대의 유명한 서예가들이 대부분 여기에서 필요한 경험담을 흡수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중에는 안진경의 영향을 비교적 심각하게 받았다고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필법이나 자형상으로 안체의 특징을 따르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원나라의 강리회회와 유관, 명나라의 이동양과 소보, 청나라의 유용·전풍·하소기·옹동화와 같은 이들이다.

◈안진경(顔眞卿)
唐해서의 창안자인 顔眞卿(안진경)중국 당나라(709∼785)은 중국 산동성의 사람으로 호는 應方(응방)이고 字는 淸臣이다.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며
노군공에 봉해졌으므로 안노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에 장욱을 배우고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등 새 풍격을 이루어 왕희지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후대에 끼쳤다.
해서의 조형에 있어서 안진경은 전서와 예서의 특징을 흡수하여 이를 그의 해서에 적용시켰다.
많은 서예가들의 해서가 큰 글씨 쓰기에는 적당치 않았는데
안진경의 해서는 오히려 큰 글씨에 더욱 그 묘한 맛을 발휘한다.

대표작은 해서의 '안근례비' ,'안씨가묘비'와 행서의 쟁좌위(爭座位)가 있다.
안진경 글씨의 품격은 웅장하고 남성적이다.

중국 당나라 서예의 대가.
산뚱성 낭야 임기 출 신이고, 북제의 학자 안지추의 5대손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가 되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을 맞았으며,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을 위하여 싸 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현부상서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 의 명으로 회서의 반장인 이희열을 설득하러 갔다가

연금당하 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 에 장욱을 배우고 중장(衆長)을

합도(合度)하여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등

새 풍격을 이루었는데. 남조 이 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의 전아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당대 이후의 서도를 지배 하였 다. 인품과 충절에서도 추앙받는

까닭에 더욱 글씨가 천고에 빛남을 후세에 보여준


사람이다.


안진경이 남긴 행초서의 대표적 필적 세 가지, 즉

<<제질문고>>

<<고백부문고>>

<<쟁좌위고> > 를 가리켜 안진경삼고(顔眞卿三稿)라고 하는데,

이들 글씨는 모두 글씨를 쓴다는 의식이 없이 졸연간에 휘갈겨 쓴

초고 그 대로의 필적이어서 더욱 자연의 묘미가 있고,

가장 진귀하게 여겨지는 글씨이다.

대표작은 해서의 <<안씨가묘비>>와 행서의<<쟁좌위>>가 있고,

이 밖에도 많은 금석문과 뛰어난 수적 ( 手迹)을 남겼다.



전기작품

44세에 쓴 천복사다보탑비(千福寺多寶塔碑)

46세에 쓴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왕희지체를 본받음

50 세에 행서로 쓴 <제질문(祭姪文)>

?세.............<유중사첩(劉中使帖)>




중기작품

54세에 쓴 해서 <선우씨이퇴기(鮮于氏離堆記)>와

56세에 쓴 <쟁좌위첩(爭座位帖)>

<증태보곽경지묘비(贈太保郭敬之廟碑)>를 들 수 있다


60세에 쓴 안근례비(顔勤禮碑) ★ 대표작


63세에 쓴
대자마고선단기(大字麻姑仙壇記)>후기 대표작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이 있으며,

64세 쓴
<우승상송경비(右丞相宋璟碑)>와

팔관재회보덕기(八關齋會報德記)>가 있고,

68세에 쓴 <현정선생이함광비(玄靖先生李含光碑)>,

72세에 쓴 <안유정가묘비(顔惟貞家廟碑)> 등이 있다.★후기대표작



◈안진경의 여러 비문,

★안근례비



顔勤禮(안근례)는 안진경의 증조부로서 字는 敬이다. 안진경은 貞元 元年(정원 원년 785) 77세때 사망하였는데, 晩年에 이르러서는 그 서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心手가 다함께 丹熟(단숙)했을 것이니만큼 그러한 것을 보고자 하는 기대는 컸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半世紀(반세기) 前인 民國 11년(1922)에 長安의 舊藩(구번)해고, 즉 布政使(포정사) 소속의 창고 뒤 쪽 땅속에서 顔碑 一基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안근례비이다.



안진경은 왕희지 이래의 서예와는 달리 아주 다른 용필법을 가지고 그 독특한 서풍을 형성하였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正鋒(정봉)의 전면적 채용이다.

晉(진) 이래 唐(당)에 이르는 용필법을 指掌法(지장법)이라고 해서, 팔만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도 움직이고 붓끝을 사방 팔방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야말로 변화에 풍부한 필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안진경은 지장법에 의하지 않고 정봉, 즉 수직으로 붓을 세운 채로 쓴 부완법을 사용했다.

그의 글씨는 藏鋒(장봉: 鋒芒(봉망)을 획 안쪽으로 하여 밖으로 노출되지 않게 하는 형식) 이라고 한다.

장봉이라는 것은 보통 붓끝이 획의 중심을 지나간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으나 正鋒(정봉)으로 쓰면 자연히 안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지장법에서도 장봉을 원칙으로 한다.

장봉을 정봉으로 쓰려는 경우에는 直上으로부터 압력으로 힘을 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위로부터 힘을 가감하는 것이나 운필의 減速(감속)등에서 안진경의 독특한 필법이 생겨나는 셈이다.


안진경이 증조 근례를 위하여 세운 신도비로, 안가묘비와 더불어 안진경 해서의 2대 대표작이라 칭할수 있는 역작이다.

이 비는 근년(1922)에 발견된 것으로써 비면도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가장 신뢰 할수 있는 대표작이라 볼수 있다.

더욱이 장기간 사중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자획이 완호하고 또한 후기의 모각이 가해짐이 없어 타비보다 존중되고 있다.

이 비는 안씨가묘비와 같은 서풍이지만, 둥근 가운데 강한힘과 부드러움이 흔연일치하고 단연하여 원숙의 묘를 나타내고 있고, 더욱 세련되어 있는 필치로 볼수 있으며, 지교를 발휘한 작품이라 여겨진다.


★안씨가묘비<780>

안씨가묘비는 72세의 작품이다. '

허단제발'에서 "전서의 정법을 터득한 사람은 안로공뿐인데,

이 가묘비는 공이 지극한 힘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다."고 했다.

그는 나이가 많을수록 필력이 노련하고 기풍이 강하고 두터워 졌다.

그리고 가묘비를 세울 때 준엄한 기상을 가진 봉산의 위용을 갖추었고,

자신의 가문에 대한 공경의 뜻이 가하여진 까닭에 그 서를 찬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진경이 자신의 가문과 부를 위하여 혼신의 정렬을 기울였고 아름다움과 순박한 자연미까지 보여주어 중국 서사상 최고의 해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조]

안진경/제질고(祭姪稿) 부분



'질삽(疾澁)이란 점획의 형질미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다.



이는 고난도의 용필방법으로써 질감 있는 점획과 의미 있는 풍운(風韻)이 함축되어야 하며 그 표현이 비록 순수하고 진실하면서 밖으로 꾸밈이 없고 내재율은 뼈(骨)을 감추고 근(筋)을 품어야 되고 함문포질(含文包質)되어 언제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무한한 여운을 남기고 천고(千古)에 감상되는 명품이 되는 것이다.



삽필(澁筆)의 전제조건은 중봉운필을 기본으로 한다.



한 획내에서 돈좌경중(頓挫經重)이 느껴지고 획의 상하양면에 인상(鱗狀)의 기복이 있어서 매우 굳세고 연발(挻拔)하며 또한 침저혼후(沈著渾厚)하다.



또한 충실한 내용과 풍부한 필의가 들어 있음을 감지케 한다. 이는 반드시 점획 가운데 사물의 형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운필 할 때 평타과거(平拖過去)하면 무기복(無起伏)의 편박(扁薄)한 점획이 되어 골격과 입체감이 없고 먹은 종이에 파고들지 않으며 선조가 광활(光滑)하여 의취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고인들이 제기한 '영삽물활 (寧澁勿滑)', 즉 차라리 삽할 지언정 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삽(澁)적 운필법을 터득할 것인가?



일반적인 설로서, 초학자는 먼저 느리게 운필하는 것부터 익혀야 한다.



한 점 한 획의 기필(起筆)과 행필(行筆) 및 수필(收筆)하는 과정 중에서 제안(提按), 뉵좌, 왕복(往復)의 동작을 취하여야 한다. 이에 대하여 채옹(蔡邕)은 「구세(九勢)」에서 명쾌하게 삽필을 규정하고 있다.



삽세는 운필할 때 있어서 역세(逆勢)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봉전필후(鋒前筆後)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포개(鋪開)한 붓의 봉과 지면이 서로 대립하여 마찰동작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아서 돈자(頓挫)하되 회고하는 필의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 경솔하게 되면 활과 (滑過/매끄럽고 지나감)가 된다.



이는 마치 "수레를 끌고 비탈진 절벽의 다리 위를 미끄러지면서 내려갈 때 수레를 끄는 사람은 그 반대 방향으로 힘을 버텨 주어야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면서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치와 같다.

" 이 때에 내려 가려는 작용력과 버텨 주는 반작용력의 대항이 곧 삽필(澁筆)의 방법이다.

포세신이 「예주쌍집」에서 하나의 점획도 반드시 모두 삽필을 써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협의의 삽(澁)은 운필의 고저기복에 의하여 점획의 양변(兩邊)이 미끄럽지 않고 금석기(金石氣)가 나타나야 골기십족(骨氣十足)하면서 자연히 창경연발(蒼勁挻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작적으로 필획을 유유만만하게 하여 마치 사인지태(蛇蚓之態)를 나타내면 절대로 아니된다.

또한 일변(一邊)은 광활(光滑)하며 다른 한 변처럼 톱날을 만들게 되면 이는 삽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매우 가소로운 것이 된다.

이상과 같은 운필방법으로서 오래오래 연마하면 운법은 숙련되며 조봉(調鋒)동작은 자연스럽게 된다.



채염(蔡琰)은 그 아버지 채옹의 「논필법(論筆法)」을 기술하는 가운데(書有二法, 一曰疾, 一曰澁, 得疾澁二法, 書妙盡矣)라 하였듯 질과 삽이란 용필의 가장 어려운 일대 모순체이다.



용필이 너무 쾌활하면 곧 부활(浮滑)하기 쉽고 따라서 세(勢)는 삽하지 못하다. 반면에 너무 삽만(澁慢)하면 필세가 진척되지 않고 걸리고 막히기 쉬우므로 세는 질하지 않다.

용필이 삽세를 이루게 되면 필세는 또한 질해져서 중봉운필로서 풍실(豊實)한 순열(純熱)의 필력을 얻게 된다.



질은 단순히 쾌속적인 운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세질(勢疾)을 얻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가 빠르면 곧 삽하게 되기 때문에 '질삽의 묘'라는 것은 적의한 삽진(澁進)을 하면 점획은 마침내 비동(飛動)하면서 걸리고 막힌 답답한 필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유동적인 필세가 되려면 자연히 왕복의 질(疾)적 감각을 띠게 된다. 가히 중봉필력과 속도로서 필호(筆毫)와 지장(紙張)이 마찰하는 것이 질삽의 필세를 나타내는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안진경의 행서묵적인 「제질고(祭姪稿)」는 필력이 주경(週勁)한 것이 마치 추획사(錐劃沙)와 같고 욱발돈좌(郁勃頓挫)하고 자세(字勢)가 비동하여 질삽의 묘법을 얻은 가장 아름다운 전범이라 하겠다.



해서의 특징

(1) 가로획의 오른쪽이 다소 올라간다.
(2) 전-절이 전서나 예서와 다르다.
(3) 한 획에 기필, 행필, 수필의 변화가 확연하다.
(4) 점, 획은 원필과 방필로 구분된다.
기본 획
*기필은 역입을 한다.
*행필은 중봉이 되어야 한다.
*수필은 희봉을 한다.
전, 절
*붓의 방향이 바뀌는 형태에 유의한다





顔眞卿의 傳張旭 十二意筆法



* 해제


안진경은 당나라 중종 3년(709) 장안에서 태어나 덕종 원년(785) 역적 이희열에 의해 채주(하남성)의 용흥사에서 죽으니 77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어렸을 때는 선문자(羨門子)라고 불렸으며,

대종 때 노군개국공으로(魯郡開國公)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죽은 뒤 문충(文忠)이란 시호는 받았고,

그의 조상은 낭야 임기(산동성 임기현)에서 살았으며

대대로 절의(節義)를 중히 여겼고,
학문과 서예에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 진경은 어려서 아버지(惟貞)를 잃고 어머니 은씨(殷氏)와 백부(元孫) 등에 의해 양육되었다.

진경은 개원(開元) 22년(734) 26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그의 약 반세기에 이르는 벼슬살이 동안 항상 세속적인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충의(忠義)의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강직함은 당시의 권력자들에 의해 지방관으로 좌천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그의 반세기와 당나라 조정의 반세기는 고난의 시기였다.
조정에서는 안록산(安綠山)의 반란(천보 14, 755)이 일어났고,
당시 평원(平原, 산동성) 태수로 좌천되었던 진경은 의병을 일으켜 평원성을 사수하는 충성을 보였다.

반란 후 절도사 이희열(李希烈)이 모반하자 재상 노기(盧杞)의 책략에 의해 진경은 줄을 줄 알면서 이희열에게 나아가 그를 설득하다

덕종(정원 원년, 785)때 채주의 용흥사에서 비극적인 일생을 마쳤다.


안진경의 글씨는 우세남(虞世南)·구양순( )저수량( )과 함께 당나라 사대가(四大家)로 손꼽힌다

. 중국의 전통서예는 종요·장지에서 서성 왕희지가 이를 계승하였고,
수·당에서 본류가 형성되었다.

장욱과 안진경은 전통서예의 흐름에서 가운데에 위치한다

진경은 왕희지풍을 배웠고, 전필(篆筆)로 서풍을
일변(一變)시켰다. 즉, 안법의 창시가 된 것이다.

황희지풍의 세련되고 전아(典雅)한 글씨에서 엄숙하고 규모가 웅대하고 역감(力感)이 있는 새로운 풍을 열었던 것이다. 이는 그 뒤 송나라에서 유행한 개성이 풍만한 글씨의 연원이 되었다.

이러한 안진경의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웠으나
장욱(張旭, 생몰년 不詳, 자는 伯高, 吳郡-강소성-사람)에게 필법을 전수 받았다.

두보의 것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겄에서는 장욱을 초성(草聖)이라 불렀다.
장욱 뒤의 회소(懷素)는 연면초(連綿草)의 명수로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장욱과 회소를 것장전소광(張顚素狂)겄이라고 불렀다.

「述張長史筆法十二意」는 『서법정전(書法正傳)』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안진경이 장욱의 필법을 전수받은 사정과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장욱은 양(梁)나라 무제(武帝)때 『관종요서법십이의(觀鍾繇書法十二意)』의 뜻을 안진경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당시의 필법을 전수하였다.


『십이의필법(十二意筆法 )에는



평(平)·직(直)·균(均)·밀(密)·봉(鋒)·력(力)·전(轉)·결(決)·보(補)·손(損)·교(巧)·칭(稱)의 12자로 필법을 해석하고 있다. 『십이의필법』의 전수를 마치면서 진경이 것工書의 妙겄가 무엇이냐고 장욱에게 질문하자 장욱은 겁집필에 있다.�라고 답하였다. 집필의 이치에 대해 묻자 저수량이 말한 것인인니(印印泥)·추획사(錐劃沙)겄를 비유함으로써 용필법을 설명하였다. 이 비유는 장봉(중봉)의 의미와 필획의 골력에 대한 설명이었다. 즉, 본 서론(書論)에서는 첫째 결구법, 둘째 용필법, 셋째 포치법(장법)에 대한 내용과 넷째 것工書의 妙겄에 대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대답, 다섯째 것집필의 묘리겄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述張長史 法十二意



장욱이 말하길 평평하다는 것이 가로획을 말하는 것인데 너는 그 이치를 아느냐?

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다 대답하였다.

일찍이 선생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하나의 한 일자를
긋더라도 평평한 가로획은 모름지기 종횡으로 뻗어 있으면서도 형상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장욱이 웃으면서 말하길 그렇다 라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대저 곧바르다는 것이 세로획을 말하는데 그 이치를 아느냐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곧바르다고 반드시 세로획이 되는 것은 아니며, 곧게 내리긋는 세로획을 바르게 하지 않거나 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 라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고르다는 것이 사이를 말하는데 그 이치를 아느냐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일찌기 배울 때 획의 간격을 나타낼 때는 정확하게 하여 한 줄기 빛이라도 그 사이로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하셨는데, 이를 말함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 라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조밀하다는 것이 만나는 곳을 말하는데 그 이치를 아느냐?

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필봉을 잘 다독거린 다음 붓을 그어 완성하여야지 엉성하고 성긴 상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 라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필봉이 점획의 끝을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느냐?

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필봉은 항상 글자 획의 말단에 이르러 획이 끝날 때까지 필봉이 굳건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힘의 골력과 형체가 된다는 이치를 아느냐?

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획을 빨리 쓰면 점획 전체가 모두 힘살과 뼈를 얻게 되어 글자의 형체가 자연히 웅건하면서도 아름다운 맛이 난다는 것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

라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가볍다는 것이 꺾는 것을 말하는 바 그 이치를 아느냐?

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붓을 갈고리처럼 하여 둥글리면서 각을 만들고 다시 필봉을 모나게 꺾어 가볍게 지나가게 하여야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둥글리면서 각을 만든다는 것이 필봉이 은밀하게 지나가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 라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터진다는 것은 억제한다는 것으로 이 이치를 아느냐?

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삐침을 할 때 억제하는 듯하면서도 첨예한 뜻으로 필봉을 꺾으면서 주저하거나 막히지 않게 하여 험준한 맛이 나도록 완성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터진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 라고 하였다.

장욱이 말하길 보충한다는 것은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치를 아느냐?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선생님께 듣기를 점과 획을 구성할 때 엉성한 곳이 있으면 다른 점과 획으로 이 부분을 보강하여 전체의 구성을 원만히 하여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 라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던다는 것은 남음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치를 아느냐?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일찍이 선생님께 배운 바, 의취는 길고 필획이 짧더라도 항상 뜻과 기운은 남는 맛이 있어야 하며 획은 부족한 듯이 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라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공교하다는 것이 포치를 말하는데 그 이치를 아느냐?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글씨를 쓰기 전에 먼저 글자의 형태와 포치를 미리 생각하여 평온하게 하여야 하는데,

때로는 의외적인 형태가 나오고 기이한 형세도 있게 되는데, 이것을 일러 공교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고 하였다.

장욱이 또 말하길 저울질 한다는 것이 크고 작음을 말하는데 그 이치를 아느냐?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였다.

일찍이 가르침을 들은 바에 의하면 큰 글자는 재촉하여 조금 작게 써야 하고,
작은 글자는 펼쳐서 크게 하여 두 가지가 잘 어울려 빽빽하고 조밀한 모양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들었는데,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장욱이 말하길 그렇다. 너의 말이 자못 모두 가깝게 되었다. 앞으로 정교한 생각을 하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모두 스스로 마땅히 묘한 필력이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 무릎을 바짝 디밀고서는 말하길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에게 용필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 그런데 감히 한 가지 더 여쭤 보겠습니다.

어떻게 글씨의 묘미를 깨달아야만 옛사람의 글씨와 같아질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욱이 말하길 묘미는 바로 붓을 잡는 데 있다.

붓을 잡을 때에는 원만하게 조정할 수 있게 하여야 하며, 억지로 구속하거나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 다음은 법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법이란 입으로 전하고 손으로 전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에 대한 헤아림이 없어서는 안되니 이를 소위 필법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은 글자의 배치에 관한 것이다.

배치를 할 때 너무 느슨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흐트러져서도 안된다. 교묘하게 배치를 하면서도 이것이 모두 합당하고 마땅해야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종이와 붓이 좋아야 한다. 그 다음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모든 것이 뜻에 맞아야 한고, 마음대로 풀어 놓고 구속하더라도 모두 법도가 있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가 구비된 뒤라야 비로소 옛사람의 글씨와 같아질 수 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것을 다 듣고는 다시 장욱에게 말하길
감히 선생님에게 신의 용필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장욱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게 필법을 전수해 준 사람은 나의 작은 외삼촌인 육언원이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길

내가 옛날 글씨를 배울 때 나름대로는 비록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였는데도 어쩐 일인지 써 놓고 보면 특별한 묘미가 들어 있지 않았다.

후에 저수량으로부터, 용필법은 마땅히 송곳으로 모래에 획을 긋는 것처럼 하거나 봉니를 찍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처음엔 그 뜻을 깨우치지 못하였다.

그러다 후에 강이나 섬에 놀러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평평한 모래사장을 대하게 되었다. 그

러자 문득 글씨를 쓰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이에 우연히 날카로운 칼끝으로 획을 그어 글씨를 썼다.

그러나 획이 단단하면서도 험한 형상이 나타났는데, 그 속에는 날카로움과 아름다움이 함께 분명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송곳으로 모래에 획을 긋는다는

추획사의 용필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만일 필봉을 감추어 쓰는 장봉을 운용하면 획은 침착한 모양이 나타나게 된다

. 그리고 옳게 붓을 사용하려면 항상 붓끝이 종이의 뒷면까지 스며들게 할 정도의 힘을 가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공의 비결이다. 해서나 초서를 쓸 때 용필법은 모두 모래에 획을 긋고 봉니를 찍듯이 하면 점과 획이 깨끗하면서도 아름다워져 그 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 이와 같은 방법으로 꾸준히 연습한다면 자연히 옛사람의 글씨와 같아질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잘 생각하여 오로지 그와 같이 되도록 열심히 노려하여야 한다. 그리고 점과 획을 결코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되니 너는 이것을 잘 명심하도록 하여라겄라고 하였다.�
나는 드디어 감사한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고 머뭇거리면서 두 번 절하고는 물러 나왔다.

이때부터 서예의 오묘함에 전공하기를 이에 5년이 되니, 해서와 초서가 스스로도 가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 작가의 생애

顔眞卿(709~785)은 字는 淸臣이며, 唐의 琅邪臨沂(山東省 臨沂縣)사람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王羲之와 同鄕이다. 안진경의 五代前 祖는 <顔氏家訓>의 著者로서 유명한 안지추(531~600경)이며, 三代前 祖(曾祖父)인 顔勤禮의 형인 안사고(581~645)는 <五經>의 校勘者로서, 또는 <漢書>의 注釋者로서 著名한 학자이다. 명문 출신이나, 어렸을 때 고독하였으며 또한 빈궁하였기 때문에, 紙筆의 비용도 궁핍하여 황토로 벽에 연습하여 썼다는 苦學力行한 사람이다. 破屋으로 비가 샌 흔적을 보고 書法을 깨달았다고 하는 '진경의 屋漏痕'의 일화가 있다. 博學하고 辭章에 뛰어났으며 또한 能書家가 되었다. 開元중 進士에 추천되어 天寶末에 太守가 되고, 德宗 때 太子太師를 맡게 되어 魯郡開國公봉하여 졌다. 때문에 顔平原公, 顔魯公의 칭도 있다.
안진경은 능서가로 이름이 높으나 충열한 武將인 점도 역사에서 알 수 있다. 安祿山의 亂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멸망시켰다. 李希烈이 반란하였을 때는 군으로 하여금 順逆을 誨諭하기가 통렬하였다. 이때 희열은 병사 천여 명으로 이를 포위하고 慢罵 위에서 칼을 빼어 擬制하였으나 神色自若하여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무리를 물리치고 예우했다. 나중에 뜻을 바꾸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기를 2년 興元元年 8월에 결국 목매어 죽었다. 이때 76세로 덕종은 이를 듣고 廢朝하기를 5일에 이르고, 司徒를 贈하여 文中으로 시호하였다. 一身이 節義인 사람으로 진경이 조정에 서서 기색을 바로하면 剛으로 禮하고 公言直道가 아니면 마음에 싹트지 않는다고 하는 豪快淸廉한 성격으로 천하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노공이라 칭했다.

2. 작품소개

안진경이 남긴 서예작품은 매우 많은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약 70여점이 된다. 또한 지금까지 유전되고 있는 비각과 탁본 또는 진적도 적지않으며, 이것들은 모두 이미 국내외의 인사들에게 귀중한 역사적인 문물로 취급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하여 안진경의 서예를 크게 전기, 중기, 후기의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안진경의 나이 50세(758년) 이전이 전기 작품 시기에 속한다. 이 시기는 안진경이 옛사람의 필법과 민간에서 유행하는 서예를 소화하고 흡수하는 단계로,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그의 나이 44세에 쓴 해서 <天福寺多寶塔碑>와 46세에 쓴 <東方朔畵贊>이 있다. 전자는 필법에서부터 결구에 이르는 모든 것이 수,당시대의 민간에서 유행하였던 글씨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에 비하여 후자는 왕희지가 쓴 <동방삭화찬>을 본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宋나라 蘇動坡는 <東坡題跋> 권4에서 말하길 '안진경이 쓴 비석 중에서 오직 <동방삭화찬>은 맑으면서도 웅건한 기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글자의 행간이 빗살같이 촘촘하면서도 답답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다시 왕희지의 것을 보면 안진경의 글씨가 이것을 임서함에 있어서 비록 조그만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기운은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안진경의 나이 50세에서 60세에 이르는 기간(758~768년)을 중기 작품 시기라 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그의 나이 54세에 쓴 해서 <鮮于氏離堆記>와 56세에 쓴 <贈太保郭敬之廟碑>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안진경의 강건하면서도 웅후한 기풍과 기세가 당당한 풍격을 이미 형성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 시기의 명작으로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나이 50세에 쓴 <祭姪文>과 56세에 쓴 <爭座位帖>그리고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서품으로 보아 앞의 것보다는 조금 전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劉仲使帖>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서 작품은 모두 특정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작자의 강렬한 감정을 폭발시켜 충만된 정력으로 단숨에 써서 완성한 것들이다.
안진경이 60세에 쓴 <顔勤禮碑>는 그의 서예가 완전히 성숙하는 후기로 들어가는 표준적인 작품이다(이 작품은 안진경 나이 60세(768)에 문장을 짓고 書丹을 하였으며, 大曆 14년(779년 71세)에 刻을 하였다). 이 시기에 씌여진 명작은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를들면 그의 나이 63세에 쓴 <大字麻姑仙壇記>와 <大唐中興頌>이 있으며, 64세에 쓴 <右丞相宋璟碑>와 <八關齋會報德記>가 있고, 68세에 쓴 <玄靖先生李含光碑>, 72세에 쓴 <顔惟貞家廟碑> 등이 있다.
<제질문>은 안진경이 조카인 季明을 위하여 지은 祭文의 초고이다. 당 현종 天寶 14년(755년), 북방의 광대한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낙양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당시 平原太守였던 안진경과 그의 사촌형인 常山太守 안고경은 산동과 하북의 경계 내에서 반란군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안고경의 아들인 계명은 평원과 상산을 왕래하면서 연락을 취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상산이 반란군에게 함락되어 안고경 부자는 포로가 되었다가 차례로 피살돠고 만다. 숙종 乾元 원년(758년), 안진경은 하북을 찾아 그를 위한 제문을 손수 짓고 제사를 지냈다. 안진경이 이 제문을 대할 때,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반란군에 대한 울분의 감정, 게다가 갑자기 집안이 몰락하고 친척이 뿔뿔이 흩어졌던 비통함이 한꺼번에 가슴 속으로 말려 들어왔다. 따라서 제문을 쓸 때에는 이렇게 격분된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필법이야 어찌 되었건 단숨에 써내려 갔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더라도 안진경은 장기간에 걸쳐 갈고 닦을 서예의 솜씨를 조금도 구속받지 않고 유감 없이 펼쳐나갔던 것이다. 전편에 걸친 운필이 과단성이 있으면서도 유창하고, 붓을 꺾는 곳에서는 필봉의 변화가 그대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많은 갈필은 본래 제문에 임할 때의 격렬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지 의식적으로 예술성을 고려해서 쓴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오히려 더욱 호매한 풍격을 드러나게 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동진 이래로 내려왔던 행초에 대한 변혁이자 동시에 창조였던 것이다.


<쟁좌위첩>은 대종 光德 2년(764년)

, 안진경이 당시 僕射(복야)로 있던 곽영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광영의는 당시 환관이었던 어조은에게 아첨을 하느라고 두 차례나 열린 융숭한 잔치에서 백관을 지휘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어조은의 자리를 높게 빛나도록 하였다.
안진경은 이러한 사실을 곽영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엄중하게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를 '어찌 대낮에 돈을 챙기는 선비와 다르랴!'
라고까지 질책하였다.

더욱 가치 있는 사실은 당시 대권을 손아귀에 쥐고 오만방자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어조은에게, 안진경의 이러한 행동은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쟁좌위첩>을 보면, 전편에서 글씨의 기세가 충만하고 강하면서도 활달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안진경의 강직한 성격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마음, 그리고 질박하면서도 중후한 성정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3. 서예사적 가치

<안체>가 후세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안진경 이후에 출현한 당나라의 서예가 유공권은 바로 이 <안체>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창작을 하였다. 송나라 4대가 중에서 소식과 황정견, 그리고 채양 등은 무도 이 안체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인 미불은 비록 안체에 대하여 불합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도 <쟁좌위첩>을 좋아하여 진지하게 임모를 하였다. 송나라 이후 안진경의 글씨는 가면 갈수록 더욱 많은 영향력은 가지고 있었으니, 각 시대의 유명한 서예가들이 대부분 여기에서 필요한 경험담을 흡수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중에는 안진경의 영향을 비교적 심각하게 받았다고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필법이나 자형상으로 <안체>의 특징을 따르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서예의 발전에 이렇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근본적 원인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형식이 바로 중국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심미안과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사람의 미에 대한 취미와 기호는 풍부하고도 다양한 것이다. 어떠한 예술창작을 막론하고 그것이 진정으로 진보적이고 진실성이 있으며 또한 아름답다면 그 풍격이 웅장하든 화려하든간에 모든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근면하고 용감하며 넓은 배포를 가지고 있는 중국사람이기 때문에 강하고 착실하며 웅장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예술창조를 중요시하고 있다. 서예에서도 <안체>는 비교적 이러한 특질을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다.
안진경의 서예는 독창성과 예술풍격이 풍부한 글씨이며, 또한 이것은 당시 사화현황과 본인의 성격과 사상이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남긴 대량의 작품은 진기한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서예의 특질을 연구하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4. 참고 서적

鄭台喜 讀, 中國書藝의 理解 - 圓光大學校 出版局, 1996
崔長潤 讀, 中國書人傳 - 雲林筆方, 1977
郭魯鳳 選讀, 中國書藝論文選 - 東文選, 1996
神田喜一郞 著, 李憲淳, 鄭充洛 讀 - 中國書藝使, 1992






◈안진경의 서법을 익히면,어떤 필력을 득할까,,



안진경의.가장 중요한 부분은,, 중봉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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