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중국 서예가 왕희지(王羲之)307-365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7. 8. 31. 16:22

본문

왕희지(王羲之)307-365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자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句)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智鑒)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孫綽)․이충(李充)․허순(許詢)․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 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난정서(蘭亭敍) 


난정서는 천하 제일의 행서로 여겨진다. 진(晉)나라 목제 영화9년(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는 사안등 41명과 함께 회계의 산음(山陰)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성대한 계사를 거행하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서 시를 지었는데 당시 나이 51세인 왕희지는 거나게 술을 마신 뒤 잠견지(蠶繭紙)에다 서수필(鼠鬚筆) 을 사용하여 단숨에 천고의 명작이라고 알려진 [난정서]를 썼다. 전문은 모두 28행으로 전체의 글자수는 324자이다. 작품 전체가 굳세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충만되고, 종회의 형세의 변화가 무궁하며 행서에서 볼수 있는 기복과 변화, 강한 리듬감, 형태의 다양한 변화, 점획의 서로 상응하는 것들이 충분히 표현된 작품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희지의 난정서는 그의 7대손인 지영에게 전해졌으며, 지영이 다시 제자인 변재에게 이를 물려 주었다. 당 태종은 어사인 소익을 변재가 있는 곳으로 파견하여 그를 속여서 [난정서]를 취한 다음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에게 임모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진본은 당태종의 부장물이 되었으며 지금 전해지는 것은 당나라때 임모본이 전해진다.

 

십칠첩(十七帖)


이 법첩 첫머리에 십칠일선서(十七日先書)가 나오므로 법첩 전체를 십칠첩으로 일컬었다. 옛날부터 초서(草書)의 전형으로 존중되었으며, 왕희지 초서 연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자료이다.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은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그 수집에 전력을 다하였고, 그는 왕희지의 글씨 3,000여 장을 모아 이를 분류 정리하여 80첩을 만들었다. 십칠첩은 그 중의 하나로, 일민첩(逸民帖)을 비롯, 29점이 수록되어 있다.


서예사적 가치


왕희지는 중국 서예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예가라면 누구나 할것없이 왕희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수 있다.

천하제일의 “난정서”를 비롯하여 왕희지의 작품 또한 어느 누구도 따라 갈수 없는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서예가 왕희지는 앞으로도 서예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참고서적


난정서(석곡실상해법서선5):이화출판사

난정서(1974년) 서울:왕서각

서예기법시리즈(1973) 서울:시청각교육사

행서 난정서 서울:우람문화사

왕희지난정서(1975) 송원문화서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