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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해남윤씨녹우단(海南尹氏綠雨壇)

☞여행·가볼만한 곳/국내·문화.유적

by 산과벗 2007. 9. 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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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유물관

 

 세연정 모형

 가야금

 교지

 

 녹우당 들어가는 문

 녹우당

해남윤씨녹우단(海南尹氏綠雨壇 사적  제167호)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집으로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1476∼1543)이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집터 뒤로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는 벼루봉과 그 오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인데, 앞면에 사랑채가 있고 서남쪽 담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에 있던 집을 현종 9년(1668)에 이곳에 옮긴 것이다. 사랑채 뒤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ㄷ’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한 채가 있고 담장 밖에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 등이 있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단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거져 있다. 이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 『산중신곡집』(보물 제482호), 『어부사시사집』 등의 지정문화재와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녹우단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청)

 녹우당 현판

 

 

 

 

 고산 사당

 어초은 사당

어초은 : 고산의 고조부 어초은(漁樵隱)은 諱효정(孝貞)이요 증조부는 귤정 구(衢)이며 조부는 좌참찬 의중(毅中)이다. 공은 숙부 되는 유기(唯幾)의 양자로 8세에 들어가서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있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총명했고 아담한 용모에 숙연한 기상을 지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하였다. 일정한 스승에서 수학하였다는 기록은 없고 주로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독특한 것으로 전한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좋아하여 그후 85세에 이르기까지 시작활동(詩作活動)을 계속하였다. 현재 전하는 고산의 시는 한시가 259수 시조는 75수이다

 추원당

 추원당

 추원당 현판

 어초은 묘소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정치적 다툼으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고향인 해남에 있을 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인조는 이미 남한산성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의 산세의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한다.

고산연보에 의하면 이곳에 온 때는 1637년 2월로 그의 나이 51살 때 일이다. 자연물에 각기 그 형태에 어울리도록 명명하여 자연을 벗삼았다 말년에 마지막 노경을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 85세(1671)로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출처 : 내일의 어제
글쓴이 : 내이름은아무따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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