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영월 청령포와 단종릉

☞여행·가볼만한 곳/국내·문화.유적

by 산과벗 2008. 9. 9. 13:53

본문

단종릉

 

의금부도사 왕방연은 기가 막혔다. 어린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 청령포로 유배 가는 길을 호송하라더니,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김질의 고자질로 발각돼 단종에게 사약 내리러 가는 길에도 자기 더러 동행하라는 것이다. 자칫 거역의 기미라도 보였다간 계유정란(1453)으로 정권을 탈취한 수양대군 실세들이 가만 놔둘 리 없을 테고-. 병들어 자연사하는 것도 원통할진대 비명횡사 자청할 자 그 누구이겠는가.

◇세조가 내린 사약을 단종에게 전한 의금부도사 왕방연의 참담한 심경을 읊은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은 각혈할 것 같은 참담한 심경을 한 편의 시로 담아냈다. 어쨌든 자신이 전한 사약을 마시고 단종(재위 1452∼1455)이 17세 나이로 승하한 것 아닌가. 그는 서울에 도착한 직후 관직을 내던진 뒤 봉화산 아래 중랑천 변에 배나무를 심고 묵객으로 생을 마쳤다.

왕방연이 배나무를 심은 뜻은 처연하기만 하다. 한여름 땡볕 유배 길에 목이 탄 상왕이 물 한 모금 마실 것을 청했으나 세조 어명으로 끝내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단종이 승하한 날이면 자신이 농사지은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영월을 향해 놓고 고두배(叩頭拜)했다. 배 맛이 유난히 단 데다 물이 많고 시원했다. 이후 이 일대 구리 태릉 지역에서 생산되는 배를 ‘먹골배’라 부르게 되었다.

세조는 단종을 죽여 동강 물에 던져 버리게 하고 시신을 묻는 자는 삼족을 멸해 버리겠다고 했다. 천지간에 아무도 나설 사람이 없었다. 이때 하늘이 내린 의인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영월 호장(戶長·지방 관아의 우두머리 벼슬) 엄흥도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고 분연히 나서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상왕 시신을 몰래 수습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동을지산에 암장해 놓았다. 눈 덮인 겨울날 노루가 앉아 있다 떠난 자리만 녹아 있어 그 자리를 파고 묻었다.

◇귀양살이 할 때 단종이 살던 집. 북향으로 서울을 향해 있다.

역사는 세조 편으로 흘러 60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자신이 묻힌 곳을 말해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깬 박충원이 엄흥도 후손과 함께 암장 묘를 찾고 봉분을 수축하여 봉제를 올리니 오늘의 장릉(莊陵)이다. 서울과 경기권을 벗어난 유일한 조선 왕릉이다. 장릉에는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엄흥도 정려각(旌閭閣)이 있어 참배객들을 숙연하게 한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위시해 조사(朝士) 환관 군노 등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극형을 당한 264인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한식 때 제사를 지낸다.

만고충신 엄흥도가 목숨 걸고 매장한 단종릉은 어떤 자리일까. 엉겁결에 황급히 쓴 무덤이어서 몹쓸 혈처는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벽계 조수창 교수(동국대 사회교육원)와 그가 회장으로 있는 벽계풍수학회 회원들과 확인해 보니 이기(理氣)와 형기(形氣)를 고루 갖춘 손색없는 명당 왕릉이었다.

정자각에서 올려다보는 장릉은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듯 해야 한다. 혈처를 이루는 당판 용맥 자체가 큰 바다를 막은 거대한 방조제같이 엄청나게 뻗어 있다. 능상에 올라 양 옆을 내려보니 현기증 날 것 같은 용선(龍線)이다. 나성(羅城)처럼 뻗은 순전 앞 정령송(精靈松)이 단종에게 큰 위안이 될 듯싶다. 1999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사릉(부인 정순왕후 능)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다. 한때는 장릉과 사릉을 한곳에 합치는 방안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지방자치단체 간의 이해가 엇갈려 무산되기도 했다.

◇장릉 아래 있는 배식단사. 단종을 위해 극형을 당한 264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벽계와 그 일행이 후룡맥 30여m 지점 분수척상(分水脊上)에서 입수 용맥을 잰 후 장릉 뒤 20m 지점 돌출한 부위에 올라선다. 자세히 보니 큰 용이 똬리를 튼 듯 겹겹이 둥글게 엉켜 있다. 태극훈의 중앙으로 또 하나의 음택이 자리하고 있다. 벽계의 응축된 내공이 풀어져 나오자 이종춘(68) 정춘재(72) 조준택(51) 김기선(41) 최도의(49) 김명해(50) 전영식(39) 이동원(39)씨 등 학회 간부들이 얼른 받아 적는다.

“잘록한 봉요(蜂腰·벌의 허리)를 이루며 좌우에 귀인사가 시립했어요. 예부터 봉요 뒤에 대혈 있다 했습니다. 주변의 둥글둥글한 연봉(連峰)들이 실 한 타래만 있으면 꿰어질 것 같은 구슬 같잖습니까. 옥녀천주형(玉女穿珠形)에 안산도 타원형 구슬의 주안(珠案)입니다. 건너편 조산은 봉연(鳳輦)으로 군왕이 타고 다니는 가마 형국이고 수구사(水口砂)도 기고한문(旗鼓?門·깃발 들고 북치는 물형)을 이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재룡(裁龍)을 해보니 계축(북→동으로 22.5도) 쌍산에서 약간 비튼 계(북→동으로 15도)룡으로 음양 배합이 잘 돼 있다.

◇만고충신 엄흥도 정려각. 삼족의 멸문지화를 무릅쓰고 단종을 장사지냈다.

“일부 자료에는 신(서→북으로 15도)좌 을(동→남으로 15도)향으로 전해 오는데, 술(서→북으로 30도)좌 진(동→남으로 30도)향이 맞습니다. 나경 24분금 중 15도 차이지만 정음정양에 따라 진혈(眞穴)과 가혈(假穴)을 가려내는 척도가 됩니다. 계(양)축(음) 쌍산룡에 계(양)룡으로 입수했으니 양룡으로 용사해야 맞는 거지요. 신(辛)좌는 가화(假花)가 됩니다.” 문화해설사의 도움으로 봉분 앞에 근접해 계측하니 틀림없는 술좌진향이다.

영월에는 단종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남면 광천리에 있는 청령포는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서강 변에 있다. 3∼5m의 깊은 물길이 삼면을 에워싸고 육지와 통해 있는 뒤쪽은 가파른 층암절벽이어서 아무나 오를 수 없다. 절묘하게도 천연요새를 유배지로 골라 어린 임금을 압박하고 자결하도록 윽박질렀던 것이다. 청령포(淸令浦)와 청랭포(淸冷浦)라는 이중 표기가 거슬린다.

배를 타고 청령포에 이르니 단종이 살았다는 집이 복원돼 있다. 2000년 4월 새로 지은 초가집이다. 좌향을 측정하니 오좌자향으로 정북향이다. 이곳에는 상왕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들었다(音)해서 이름 지은 관음송이 600년 세월을 버텨 아직도 건강하다.

“터를 고를 때 음택은 좁혀 보고 양택은 크게 넓혀 봐야 합니다. 청령포는 양택지로 보이지만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갑작스러운 호우로 물이 불어나면 속수무책이니까요. 누가 봐도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으로 산태극 물태극까지 이루니 경관은 이를 데 없는 절경입니다.”

◇청령포 금표비 앞에선 벽계풍수학회 회원들. 왼쪽부터 이종춘 정춘재 조준택 김기선 조수창(회장) 최도의 김명해 전영식 이동원씨.

영월에는 며칠 째 궂은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단종 유적지 보호를 위해 1726년 영조대왕이 세운 금표비(禁標碑) 옆 근처에서 벽계가 집터를 찾아냈다. 복원된 집터에서 15∼20m 지점이다. 신술(서→북으로 22.5도)내룡이 술(서→북으로 30도)입수룡으로 살짝 틀어 청령포 물길 앞에 우뚝 서서는 병오(남→동으로 7.5도)룡으로 급히 변신해 오(정남)룡이 된 넓은 척상이다.

등 뒤 부모산을 의지한 낙산(樂山)이 좋고 물길 너머 펼쳐진 난간 물형의 난대(欄臺) 안산이 정겹게 다가온다. 단종이 이 자리에라도 집 짓고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단종은 승하 후 태백산 신령이 되어 고단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고 있다 한다. 능 입구 안내문에는 직장인에겐 영전 기회를 주고 정치인은 당선의 영험을 얻는다 하여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특히 장릉제향 때 진설된 제물은 아들 못 낳는 사람들에게 효험이 크다고 널리 소문나 있다. 필자는 2005년 10월 3일 단종 능제향 때 대축관(大祝官)으로 봉무한 적이 있다. 제향이 끝난 후 순식간에 제물이 사라졌던 기억을 갖고 있다.

능제향의 축문은 왕과 왕비의 시호와 존호가 있어 사가 축문보다 훨씬 길다. 조선 제24대 헌종의 생부로 추존 왕이 된 문조(文祖) 시호는 115자여서 대축관 성음이 익숙지 않거나 한자 판독이 서투른 경우 애를 먹기도 한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