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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9일---여주 세종대왕릉/신륵사/명성황후 생가 답사

☞나의 포토갤러리/창원 박물대학

by 산과벗 2009. 10. 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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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릉과 신륵사,명성황후 생가 답사 

(10월9일)

 

안내 및 강의 : 박동백 창원문화원장 

 

세종대왕릉 

   

 ↑ 세종대왕릉/우측 옆에서 바라본 모습

  

 ↑ 세종대왕릉 앞에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 세종대왕릉/멀리서 바라본 모습

  

  ↑ 세종대왕릉 앞 정자각

 

○ 세종대왕의 생애

 

세종(世宗)은 1397년(태조6) 조선 3대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 (태종18) 양녕대군이 패 세자가 됨에따라 왕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해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54세로 승하할때 까지 31년 6개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세종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 하였으며,아악을 정리하여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여 국토를

확장 하였으며,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학문을 충정하여

학자를 양성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용비어천가,농사직설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 능의구성

 

세종(世宗)대왕의 호는 영릉, 사적 195호로 지정되었었다, 조성시기는

1469년(예종1)이며,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며,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 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 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 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 능의역사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 신륵사(神勒寺)

  

 ↑ 신륵사(神勒寺) 다층석탑

 

 ↑ 신륵사(神勒寺) 다층전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 신륵사(神勒寺) 의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

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 신륵사(神勒寺) 다층석탑

 

↑ 신륵사(神勒寺) 강월헌 

 

 

 

 

◯ 신륵사(神勒寺) 다층석탑

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은 보물 제225호로,

높이는 3m, 건립 연대는 15세기 후반쯤으로 추측되는 8층 대리석제 탑이다.

2층기단 위에 세워졌고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용문(龍文)을,

위와 아래의 갑석(甲石)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갑석이나 조각의 기법은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통한다. 탑신은 낮고 평평하며 옥개석은

두터운 판석으로 되었다.

 

◯ 신륵사(神勒寺) 강월헌

강월헌(江月軒)은 나옹선사님의 호이다. 선사님께서 이 신륵사에서 입적을

하셨는데,다비를 한 장소가 남한강을 머금고 있는 이곳 암반이었는데 후에

그 자리에 정자를 짓고 선사님의 호를 따서 강월헌이라 현액을 달았다.

천하의 명당이다.

 

나옹선사님 께서는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시를 지어셨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淸山見我 無言以生 蒼空見我 無塵以生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蒼空見我 無塵以生

無 성 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

解脫嗔怒 解脫貪慾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如山如水 生涯以去

 

 

 ○ 명성황후(明成太皇后) 생가(生家)

 

  ↑ 명성황후(明成太皇后) 생가(生家)

 

 

↑ 명성황후(明成太皇后) 전시관

   

○ 명성황후(明成太皇后)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25일 ~1895년 음력

8월20일(양력 10월8일)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황후 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씨(閔氏)로,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였다.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딸로서. 9세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그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이 출생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과 대립,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는 한편,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 여주읍 능현리 출신으로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너무 어렸다.

그리하여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고 정치실권을

잡게 되었으나 민씨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계속 충돌하였다.

1873년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대원군의 실정이

계속 되자 대원군을 탄핵하여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의 추방을 기도했다. 그러나 일본공사 미우라가 거느린

일본인 낭인들이 궁궐을 침범,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 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난자 당해 죽은 후 운반되어 소각되었다.

1897년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해 11월에 국장이 거행되었다. 능은 홍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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