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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7일---가야사의 제 문제

☞나의 포토갤러리/창원 박물대학

by 산과벗 2009. 10. 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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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7일(목)

 

◯ 주제 : 가야사의 제 문제

◯ 강사 : 남재우 교수/문학박사,창원대학교 교수

◯ 내용 :

 

1.가야사 이해와 가야연구

- 고분군 유물,유적 발견,발굴 : 정교함,가치관 등이 신라 백제에 못지않은

모습으로 보아 당시 가야의 발전모습 짐작케 함.

- 가야사는 기록 부제에 따른 역사인식 한계, 고고학적 자료가 가야사 역할.

- 최근 가야사 연구의 폭 확대

- 삼국사기에는 가야사의 기록을 신라의 입장에서 기술에 따른 문헌자료 부족

으로 가야사 미 부각.

-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설화적으로 접근,

- 최근 지방자치시대에 도래,일본사,고고학 등 자료를 근거로 가야사 연구

활발.

- 설화적 전설속의 가야가 아니라 실제 3국과 동등한 발전을 가져온 가야

인식 확산.

 

2.가야의 발전과정

- 일본과 가야 문물 교류가 가야의 발전 단계로 정리할수 있음.

- 가야의 중심지로 전반기는 김해, 후반기는 고령.

- 가야가 일본의 침공을 막기위해 고구려에 5만원군 지원 요청. 이때 고구려가

김해까지 내려온 것이 계기가 돼 가야 쇄퇴 시작.

- 6가야는 독자적 국가로 형성된 관계로 나라 이름이 각각 다름.

- 영남의 가장 찬란한 문화를 보여준 곳이 바로 동읍의 다호리 고분임.

 

3.가야의 영역과 정치

- 당시 가야의 영역은 예측하기 어려움. 하지만 전남광양,전북임실까지 영역에

둔 것으로 추정.

- 가야는 고대 둑가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으나 신라 백제에는 미치지 못함.

- 강력한 왕명에 따른 정치가 아이라 귀족을 중심으로 한 합의 체제로 정치.

- 당시 가야는 철의왕궁.지금의 창원 성산패총 이를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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