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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浮石寺),소수서원(紹修書院) 답사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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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09. 11. 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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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浮石寺),소수서원(紹修書院) 답사 여행기

(2009.10.30)

 

영주 부석사!!

백두대간의 중심축인 소백산에서 뻗어내린 능선따라 흘려내리다 다시 아담하게 솟구친 봉황산 자락에 

살포시 둥지를 튼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부석사!!

 생애 3번째 찾아가는 깊어가는 가을의 부석사는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겨줄지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깊어가는 가을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채 지루함도 잊고 고속도로를 질주한

우리를 태운 버스는 11:40분경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 부석사(浮石寺) 전경

부석사(浮石寺)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사찰로.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을 펴기 위해 귀국해 이 절을 창건했으며 이는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됐다.

부석사라는 사찰 명칭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된 이름이라 한다.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 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 주차장 도착 

창원 만남의 광장을 출발한 차량은 약 3시간여만인 11:40분경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 차량에서 냐내리고 있는 동기생들이다.

 

↑ 점심식사

버스에서 내린 일행들은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앉아 도시락를 꺼내 서로 나눠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울 큰형격인 동호 형님께서 지난 여주 답사에 이어 이번에도 맛나는 수육을 준비했다.

싱싱한 쌈배추에 막장,마늘,김치 까지 곁들어 꼼꼼히 챙겨 준비해왔다.

본인은 뒷전이고 함께한 일행들의 입을 즐겁게 해준 형님께 이자리를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 회장님 양주ㅡ한잔..

식사도중 회장님이 우리자리를 찾아 격려하며 양주한잔 씩을 권하며 나눠 마신다.

울 회장님!! 술 마시는 폼 또한 일품으로 회장은 뭔가 달라도 달라..  

 

↑ 부석사 주차장 뒤 분수공원

점심을 마치고 부석사를 향해 발길을 옮기면서 아름다운 분수공원을 만났다.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수가 하얀포말을 이루며 흩어져 물안개를 피우고 솜사탕같은 하얀 포말을 솟구치며

피어는 물거품, 분수에서 솟아나는 물보라 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두손벌려 우리일행을 반겨주고 있었다.

 

↑ 부석사(浮石寺) 전경

부석사 가는 길목엔 지역 특산물을 팔고있는 아줌마들이 즐지여 앉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남달리 예쁜 빨간 사과가 탑스럽기 그지없다.

 

↑ 은행길 초입

시골 장터같은 특산물을 파는 길을 지나자 부석사의 명물인 은행나무 길이 노란옷을 걸치고 우리를 반긴다..

버스안에서 국장님 말씀대로 부석사 은행길 단풍에 맞춰 일정을 잡았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노란길이 열려있었다.

 

 ↑ 부석사(浮石寺) 일주문(一柱門)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단풍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일주문을 지나고 있는 일행들이다.

일주문 천정은 화려한 단청을 하고 금빛 찬란한 태백산 부석사란 글씨가 제일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석사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으로  독특한 양식으로 세워져 있었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문이다.

 

↑ 은행열매

가지와의 맺은정을 모두 떨구고 가지마다 노란 은행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는 은행나무...가을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 부석사 당간주(幢竿柱)

은행길을 따라 부석사를 향하다 천왕문 앞에 세워진 당간주에 도착했다.

원장님이 우리모두를 불러 세운다.  아마 단간주에 대한 설명이 있을 모양이다.

 

↑ 당간주(幢竿柱)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원장님의 열정이 대단하신것 같다.

당간지주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 두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두 개의 받침대를 일컫는 말이라는 상세한 설명과  노익장을 과시하며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일행들을 귀 기울이게 하는 화술이 돋보인다.

 

↑ 찬왕문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 일행들

당간주(幢竿柱)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부석사 천왕문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는 일행들이다.  

 

↑ 부석사 천왕문(天王門)

사천왕을 모셔둔 천왕문이다. 천왕문 안쪽 양가에는 험상굳은 괴물같은 형상의 사천왕이 버티고 서 있었다.

쌀짝 두손모아 목례를 취하고 안으로 들어선다.

 

 ↑ 부석사(浮石寺) 풍경

사천왕을 들어서자 부석사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고 산세에 따라 경사진대로 건축되어

아래서 위로 올려다 보는 경치도 일품이다.

 

 ↑ 부석사 우측에 세워진 삼층석탑 (浮石寺三層石塔) / 시도유형문화재 130호

사진은 부석사 우측에 서있는 삼층 석탑이다.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을 1966년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한다.

탑을 옮길 때 세워 놓은 비석에 의하면 서쪽의 탑은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다.

 

  ↑ 부석사 좌측에 세워진 삼층석탑 (浮石寺三層石塔) / 시도유형문화재 130호

사진은 좌측에 세워진 삼층석탑이다.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은 크기만 약간 다를 뿐 형식은 같아서, 모두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살짝 들려 가벼움을 실었다. 꼭대기에는 후에 보충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비록 지붕돌 밑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었으나 전체적으로 당당한 기품을 잃지않은 모습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 부석사 삼층석탑 (浮石寺三層石塔)에 대한 설명

부석사 삼층석탑에 대한 설명을 등고 있는 일행들이다.

석탑의 원래 자리와 이곳르로 옮긴사유,석탑의 형태. 석탑이 세워진 연대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 부석사(浮石寺)의 가을

부석사 좌측 삼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각양각색의 가을 단풍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담고 사찰 건물과 어울려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 부석사(浮石寺) 범종(梵鐘)

부석사 범종루는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대목이다.  

 

↑ 부석사(浮石寺) 안양루와 주변풍경

부석사 안양루 앞 좌측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안양루와 주변 오색단풍이 한폭의 그림이다.

 

 ↑ 부석사(浮石寺) 건축의 특징

 

 ↑부석사(浮石寺) 담벽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원장님이시다.

 

 ↑부석사(浮石寺) 안양루(安養樓)1

사진은 안양루 좌측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단청을 했더라면 더욱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을텐데...

부석사 안양루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인 다포계(多包系) 겹처마 팔작지붕건물로.

부석사의 주불전(主佛殿)인 무량수전의 바로 앞에 세운 2층 누각(樓閣) 건물이다.

2단으로 쌓은 높고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앞쪽 2줄의 기둥은 아랫기단 위 자연석 주춧돌에 놓여 있고,

뒷줄의 짧은 기둥은 윗기단에 놓이게 하였다.

 

 ↑부석사(浮石寺) 안양루(安養樓)2

사진은 안양루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안양루는 루(樓)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한 일종의 누문(樓門) 안양문(安養門)이다. 

안양루에 오르면 발 아래로는 부석사 당우들이 낮게 내려앉아 마치 저마다 독경하고 있는 듯한 자세인데,

저 멀리 산은 멀어지면서 태백산맥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부석사(浮石寺) 안양루(安養樓)3

사진은 안양루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사명대사를 비롯한 방랑시인 김삿갓이 안양루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던

곳이라는 원장 선생님의 설명이 깃전에 와닿는다. 

 

- 부석사(浮石寺) 안양루(安養樓)에 걸린 김삿갓 시(詩) -

平生未暇踏名區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天地如萍日夜浮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忽忽馬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  

↑부석사(浮石寺) 석등(石燈) / 국보 제17호  

사진은 부석사 무량수전 앞 마당에 세워진 석등이다.

안양문을 통해 올라서자 제일먼저 무량수전 앞 석등이 우리 일행을 반겨 주었다. 

석등은 주로 법당 앞에 탑과 함께 조성되었고, 등불이 들어앉은 화사(火舍·불의 집)에서 퍼져 나오는

빛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진리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불교가 전래된 이후 진리를 밝히는 상징물로 석등이 조성됐다. 

 

부석사를 창건할 때 만들었다고 하는 이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에 든다.

이 석등을 백번만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어 부석사에 온 신도들이 그 둘레를 돌기도 한다.

또 사월 초파일이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달밤에 이 석등을 돌며 복을 빈다.  

 상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석등임을 알 수 있다.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부석사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

부석사 무량수전은 흔히 복잡해 보이기 쉬운 조선시대의 불교 건축물과는 달리 모양이 우아하게 단조로운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친다.

특히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건축학도들은 반드시 한번 들러 봐야 할 정도로

건축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다.
 

 ↑부석사(浮石寺) 전경(全景)

무량수전을 관람하고 우측 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바라본 풍경이다.

지난번에 왔을때는 조용한 산사에 어둠이 깔리면서 소백산 자락에 붉게타고 있는 노을 풍경이 

말로 표현할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았는데...

오늘은 병풍처럼 펼처진  오색단풍과 어울려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 부석사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바로 이 장쾌한 경관때문에 사찰의 중심축인 무량수전을 이곳에 세운 것이리라.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 / 보물  제249호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이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강의에 열중인 원장님 

무량수전 옆에 자리를 잡을까 하다 햇볕 때문에 무량수전 동쪽 삼층석탑옆 그늘진곳에 자리를 잡아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는 원장님이시다.

위 쪽의 삼층석탑은 비록 조금은 손상이 되어 있지만 국보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한다. 

이어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 등 에ㅡ 대한 설명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특히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 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에 보관돼 있다한다.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 / 보물  제249호

부석사 문화재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 이어 조교 앞으로..안양루와 사명대상의 글귀가 적힌 크다란 탁본 하나를

펼쳐놓고 설명은 계속된다. 

 

 부석사 조사당으로 올라가고 있는 일행들

문화원장 님의 강의가 끝나고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지척의 조사당에 들리기 위해

아담한 산책로를 올라가고 있는 일행들이다.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 국보 19호

부석사 3층석탑에서 조사당 까지는 100여m 거리는 채 3분이 거리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조사당 건물은 호하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평범한 작은 건축물로 세워져 있었다. 

 무량수전 위쪽에 위치한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으며,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 지붕으로 되어있다는 조사장옆에 세워진 안내문이 말해주고 있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한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었다.

  

 ↑선비화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을 전하는 안내문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밑에 꼿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피어 오늘에 이르렸다 하며 비와 이슬을 맞지않고서도 푸르게 자라고 있다 한다.

 

 ↑ 다시보는 부석사(浮石寺) 전경

부석사 조사당을 답사하고 내려와 무량수전 삼층석탑 쪽에서 다시 바라본 풍경이다. 자연의 미를 살려 원래 지형에 따라

계단 층층에 건물을 배치하여 자연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특히 안양루의 루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였다.

 

 부석(浮石)이란 바위

일행들은 모두 내려가고 나는 부석사 무량수전 좌측 뒤쪽에 있는 바위를 찾았다.

하늘에 떠 있는듯한 바위에 浮石이란 글자를 새겨놓은 바위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였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부석사를 세우게 했다고 전한다.

 

 삼층석탑과 어울린 풍경

무량수전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내려오면서 오색단풍과 어울린 아름다운 사찰 풍경에 도취되어 그냥 지나칠수가 없었다.

이곳 삼층석탑 앞에서 일행들 몇병 기념사진들 한장씩을 남기고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삼층석탑과 어울린 풍경

위 사진과 같은 장소인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우측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삼층석탑과 어울린 풍경

부석사를 뒤로하고 천왕문을 지나 내려오면서 우측으로 노란 은행잎이 소복히 쌓인 풍경에 취해

너도나도 할것 없이 기념사진 한장씩을 카메라에 담는다.

 

 ↑부석사 입구 단풍

부석사를 뒤로하고 일주문을 지나 입구 좌측 길가의 단풍이다. 빨간 노란 색이 한데 어울려 넘 아릅답다.

 

↑입구의 부석사 배치도

부석사 입구에 세워진 부석사 배치도다. 사찰을 탐방하는데 많은 이해와 도움을 줄듯한 안내도였다.

 

↑분수 앞에서

부석사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다시 분수대 앞에섰다. 해가 서쪽으로 기운 탓인지 사진 찍기에 좋은 시간대인것 같았다.

이곳의 톡특한 풍경을 배경으로 일행들 사진도 찍어주고 나도 폼 함 잡았는데...실물보다 훨씬 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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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紹修書院)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소수서원(紹修書院) 매표소

부석사 문화 탐방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타 약 2km 여 떨어진 소수서원 매표소 앞에 도착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죽계수를 끼고 자리한 아름다운 경관을 자라하는 소수서원은 눈이시린 경치만큼이나 가슴아픈 역사를 안고 있었다.

조선 세조때 이곳 순흥에서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획이 들통나 순흥도호부가 풍비박산 났다.

그때 희생된 수많은 시신들이 죽계수에 수장돼 10여리를 붉게 물들일 정도였는데,

그 끝이 지금도 피끝마을로 불리고 있다.

당시 이 터에 있던 통일신라의 거찰 숙수사도 불타, 서원 어귀에 당간지주만 덩그랗게 남아 있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들어가는 산책로

매표소를 지나자 매표소를  지나 넓고도 아늑한 산책로를 따라 들어간다.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듯 늠름하게 뻗은 적송 수십그루가 양길가에서 우리를 반겨준다.

적게는 100년이 넘은듯한 노송들과 주변 풍경들을 보면서 학문에의 의지를 다지는 서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입구 은행나무

소수서원 입구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노란 단풍을 매달고 우리들을 반기고 있었다.

이 능행나무는 수령 500년 된 고목으로 입구에 한그루 조금 안쪽 우측에 한그루 두 그루가 서 있엇다.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대한 강의

은행나무 앞쪽에는 사찰에나 있을 법한 당간주가 서 있었다.

창원문화원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소수서원이 있던 자리에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숙수사(宿수寺)란 절이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한다.  

 

 소수서원(紹修書院) 당간지주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 숲에 자리하고 있는 당간주의 모습이다.  당시 이 자리에 숙수사란 사찰이 있었다 한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사라졌다 한다.

이 당간주는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세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이다.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들어서는 일행들

강의가 끝나고 소수서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일행들이다. 소나무에 가려진 또 하나의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직방제(直方齊)

직방제(直方齊)는 소수서원의 원장 숙소라고 합니다.

직방(直方)이란 안과 밖을 고르게 하라는 뜻인데, 즉 마음과 행동을 같게 하라는 뜻이랍니다.

 

↑장서각(藏書閣)

장서각은 학생들이 공부할 많은 책과 목판을 보관했던 서고(書庫)였다 한다.

 

 ↑영정각(影閣)

영정각 내부에는 국보 제111로 지정된 안향초상(安珦 肖像)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라 하며,

진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안향초상(安珦 肖像)은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일영대(日影臺)

일영대는 상,하부의 석조물로 이루어진 해시계이다.

맑은날 상부석재 위에 꼿아둔 막대가 12간지에 드리워 지므로 시간을 재던 곳이다.

 

 ↑학구제(學求齊)

학구제(學求齊)는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학생들의 기숙사라고 합니다.

 

↑지락제(至樂齊)

지락제(至樂齊)...지락제 내부에는 선비들의 글귀가 그때의 풍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소수서원 안내문

영주는 유서 깊은 전통을 간직한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어 유교문화의 중심으로 꼽히는 영주는 중요한 문화 유산인 불교문화의 보고 ‘부석사’로 문화유산과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고장으로 가는 곳마다 역사의 숨결이 묻어나 경북 북부 관광의 요람이 되고 있었다.

 

 사료에 의하면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서원이자 국가의 인정을 받은 첫 사액서원이다.

서원은 선현을 배향하고 교육하는 조선조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학문을 배우고 논하는 강학당, 학생들이 기숙하는 재(齋)가 기본 시설이다.

소수서원은 1543년(중종 36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흠모하던 회헌 안향의 사당을 숙수사지에 세우면서 시작됐다.

초기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으나 이후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합법적인 인정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친필로 쓴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라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소수서원강학당(紹修書院講學堂)/보물 제1403호

우리일행은 후문으로 들어와 정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강학당을 만났다.

그러니까 정문에서 들어오면 첫번째 만나는 건물인 샘이다. 

강학당은 보물제1403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이다.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고,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었다.

 

 ↑제월교(齊月橋)

우리 일행은 시간에 쫓겨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주소수서원을 둘려보고 정문으로 빠져나와 

소수서원 박문관을 향해 제월교(齊月橋)를 건넜다.

이 제월교(齊月橋)는 죽계류를 가로질러 수서원에서 서원 박물관으로 건너는 다리이다.

 

 ↑광풍정(光風亭)

제월교를 건너 20여m 전방에 광풍정(光風亭) 이라 쓰인 사각정자 하나를 만났다.

이 광풍정(光風亭)은 퇴계 이황 선생이 명명하였다 하며,

앞으로는 죽계천이 운치있게 감아돌고, 뒤로는 소수서웜 박물관 감싸안고 있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볼수있는 곳으로 광풍정(光風亭)이란 이름은 송사 이돈 이전에 나오는 제월광풍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박물관 정원(庭園)

광풍정을 지나 박물관으로 들어서자 우측에서 좌로 돌아가는 정원의 풍경이다.

마침 단풍이 곱게물들어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정원내 고인돌/支石墓

정원따라 거닐면서 고인돌을 만났다.

남방식 고인돌로서 박물관 근처 야산에 있던 것을 복원하여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고인돌/支石墓에 대한 설명 

 

 ↑합장묘(墓)

박물관 뜰을 거닐면서 고인돌 조금지나자 목판으로된 부부 합장묘를 만났다.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영주출신 김흠조 부부 합장묘라 하며,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찡해짐을 느낀다.

 김흠조는 판결사 지낸 분으로, 470년 된 곳에서 134 점의 유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바느레 고분(古墳)

박물관 뜰에 있는 바느레 고분은 돌방무덤 으로써 이 일대에 다수 이같은 고분이 산재돼 있다한다.

 

 ↑바느레 고분(古墳) 안내문

 

 ↑소수서원 박물관 입구

정면에서 바라본 소수서원 박물관의 모습이다.

 

↑소수서원 박물관 내의 전시품/永자팔법

박물관은 모두 4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1전시실은 역사이 고장 영주, 2전시실은 유교의 전래에 대해서,

 3전시실은 서원과 향교, 4전시실은 소수서원에 관한 내용이였다.

 

전시실 내부의 모든 자료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었지만 너무 자료가 방대하고 타 관람객들의 시선도 있고해서

평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잇던 "서예" 즉 영자팔법(永字八法) 하나만 촬영했다.

 

 ↑소수서원 박물관에서 바라본 선비촌의 풍경

소수서원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정문을 나서자 기와지붕과 초과 지붕 사이로 곱게 물든 단풍과 어울린 

선비촌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같이 다가왔다.

 

자료에 의하면 와가7동,초가5동,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김문기 가옥, 인동장씨 종택, 김세기 가옥, 두암 고택,

김상진가옥, 장휘덕가옥,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 두암고택 가람집, 김구영 가옥 등이 들어서 있으며,

 민속촌으로는,

정자1동,  정려각2동,  대장간1동, 누각1동, 디딜방아1동, 원두막1동, 연자방아1개소,

산신각1동, 곳집2동  등이 들어서 있으며, 

 

영주시에서는 유교문화권 개발 사업의 하나로 1997년부터 165억원을 들여 순흥면 청구리 5만5천500㎡에

선비촌을 완공해 7년만인 2004년에 개장했다고 한다.

선비촌의 운영은 3년마다 공모를하여 민간사업자에게 위탁관리 운영되고있다고 한다. 

 

 ↑소수서원 박물관 밖 정원

소수서원 박물관 밖의 정원이다. 서원과 노송과 단풍이 어을린 풍경이 아름다웠다.

 

 ↑선비촌 입구에서

박물관을 뒤로하고 선비촌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다리 위에서 기념으로 박물관을 배경으로 폼함 잡았다.

 

 ↑열부각(烈婦閣)

선비촌 입구에는 충효의 상징인 충무각과 정조를 상징인 열부각이 세워져 있었다. 

 

 ↑선비촌 내의 초가집들...

선비촌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곳곳에 이와 같은 초가집을 배치하여 선비촌의 멋을 더해주고 있었다.

 

 ↑선비촌내의 정원

선비촌은 조상들의 역사.문화유산 복원과 생활상 재현, 선비정신 재조명  등을 통해

살아있는 전인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됐다 한다.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 현상을 해소해 보고자하는 것이 설립 취지란 설명이다.

 

↑선비촌내의 조가집

선비촌은 조상들의 역사.문화유산 복원과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비록 살림살이가 어렵더라도 잘 사는 것에 욕심이 나서 선비의 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곤궁함으로 인해 가볍게 스스로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선비촌의 기와집들

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에 재현하게 된 것이라 한다.

조상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기와집은 경북도  무형문화재인 두암고택 등 영주지역

9개 종갓집을 골라 재현했고 초가도 전통을 살려 까치구멍집 형태로 복원했다고 한다.

 

 ↑선비촌의 고택

지족(知足)의 삶이 그러하다.    

옛 선비들은 만족함을 아는 지족(知足)을 중요한 생활윤리로 삼았다.

 '노자(老子)'  44장의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데서 나온 말인데, '

그칠 줄 알라'는 뜻에서 지족(止足)이라고도 한다.

이 공간에서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선비문화수련원

선비촌을 둘려 보면서  안쪽으로 들어가다 선비촌 수련원이란 입석을 만났다.

안쪽으로 즐비한 기와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주어진 시간도 모자랄뿐아니라

출입금지란 입간판이 나의 발길을 돌리게 했다.

 

선비촌은  선비문화 수련원이라 한다. 마음과 행동을 바르게 하자는 취지에서 건립된 것이기도 하다,

영주선비문화 수련원은 성균관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한다.

전국의 향교에서 선출된 사람들이 7월 1일 부터 7월 11일까지 4조로 나눠어 교육을 받는다.

강당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130여명으로 입소를 하면 숙식을 수련원에서 하게 된다.

 

  ↑선비촌 풍경

선비문화원 입구에서 바라본 선비촌의 풍경이다. 

영주 선비촌은 소수서원과 박물관과 연계되는 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것이라 한다. 

 

↑죽계루(竹溪樓)

죽계루(竹溪樓)는 선비촌 죽계천앞에 있는 루각(樓閣)이다.

물은 사연을 따라 길을 낸다. 변함없이, 말없이 흐르지만 역사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사연을 담아 흐르는 물길에는 영주 '죽계수(竹溪水)'를 빼놓을 수 없을것이다.

죽계수는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해 영주 순흥마을을 휘감아 돈 뒤 낙동강 상류로 흘러들어 가는 물길이다.

죽계수에 담긴 사연은 녹록지 않다. 퇴계 이황 선생이 반했다는 자연의 비경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실패해 참형 당한 영주 선비들의 애절한 한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선비상

선비촌의 관람을 마치고 맨 마지막으로 주차장에 도착햇다. 입구에는 선비상이 우뚝서

영주가 선비의 고장임을 알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단체로 기념사진 한장 남기고 영주를 뒤로하고 창원으로 출발했다.

 

 답사후기 

금번 영주 부석사와 소수서원,그리고 선비촌 방문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소중한 우리문화재를 알게됨은 물론이고, 

애 처음가본 소수서원과 선비촌, 옛 선비들의 일상을 가슴으로 느껴볼수 있었던 값진 체험과 

박동백 원장님의 상세하고 자상한 설명덕분에 더욱 흐뭇함 가슴가득 안고 돌아왔다.

37기 동기생들과 함께한 이번 답사여행.. 아름다운 추억의 한토막으로 가슴길이 영원히 남을 것이다.

좋은 여행지를 선정해주신 박동백원장님을 비롯한 관계직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본 답사여행기는 교재,원장선생님 설명,인터넷을 통해 관련 자료들을 발체, 정리한 기록으로 

사실과 다소 다를수도 있습니다. 

 

글/사진 : 산과벗(김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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