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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화유적 답사기(2009.12.4)

☞나의 포토갤러리/나의 旅行記

by 산과벗 2009. 12. 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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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문화유적 답사기

           ☞ 언   제 : 2009.12.4(금)

             ☞ 누구와 : 창원박물대학 37기 동기생 110여명(버스3대)

             ☞ 어디로 : 경주 (황룡사지/감은사지/문무대왕수중릉/경주박물관 등)

 

 

               

 문화유적 답사차량 

 오늘은 졸업답사 여행!! 봄기운을 방불케 하는 겨울날씨 답 잖은 포근한 날씨다.

이번 경주 답사지는 두어번 이상 찾은 곳이라 별다른 설레임은 없지만 의미있는 답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안고

집을 나선다. 만남의 광장에는 많은 동기생들이 먼저도착,차량 3대에 편승 창원을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창 밖으로 주마등 처럼 펼처지는 겨울풍경에 시선을 던진채 우리일행을 태운 버스는 11시경 경주에 도착했다.

 

 ↑ 황룡사지로 향하는 동기생들

첫번째 찾은 곳은 황룡사지 이다. 이곳은 한번 와본 곳으로 특별한 감정은 없으나 평소 와는 다른 의미있는

답사가 될것이란 기대속에 일행들과 함께 넓다란 농로를 따라 황룡사지로 향한다. 

 

  ↑ 황룡사지/사적 제6호  

사진이 황룡사 절터다.

돌이 움푹패인 곳이 불상을 모신 대웅전 자리이며, 저 앞쪽 주춧돌이 놓여있는 곳이 9층목탑을 세운 자리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53년(진흥왕 14)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9층목탑을 세웠고, 그뒤 몇 차례 중건되면서 고려시대까지 국가왕실의 보호 아래

호국사찰로서 숭앙되었으나 1238년(고종 25)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불 타버리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 황룡사지 안내문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육존상을 모셨으며, 동양 최고인 80m 높이의 목탑을 세웠다고 안내문은 말하고 있다.

 

 ↑ 황룡사지에 대한 강의

 원장님의 강의 장면이다. 황룡사지에대한 설명과 함께 신라 삼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황룡사지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14년(553)에 건립, 569년 담장을 쌓아 17년만에 완공하였으며,면적은 82,000평방미터

(24,500평)이며 위치는 동은 명활산,서는 성도산,북은 소금강,남은 남산의 교차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창원문화원장님은 전해주고 있다.

또한 신라삼보는

1. 장육존상(일장육척의 불상) ; 거선이 하곡면 사포(울주)에 도착, 공문에 서축 아육왕이 황철 5만7천근, 황금 3만푼으로

석가 삼존상을 제작하고자 하였으나 실패, 배에 실어보내니 인연이 있는곳에 장육존상이 이루어 지어다.

2. 양 협시보살 : 좌에 문수보살, 우에 보현보살,

3. 진평왕의 옥대, 이는 937년 태조 왕건에게 경순왕이 전해줌.

 

 ↑ 불상이 놓였던 자리/주춧돌

원형의 움푹패인곳이 부처님을 세운 기주 흔적이며, 네모로 패인곳은 광대를 세운 흔적이이라 하며, 

곳곳에 넓다란 돌은 기둥을 세운 주춧돌이라는 설명이다.

 

 ↑ 9층목탑 자리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기록에 따르면 

높이는 탑신부 약 65미터,상륜부 15미터 전체 80미터에 이르며, 이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 9층목탑에 대한 설명 

각각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의미하며,

이 탑을 건축하면 주변국들이 절로 신라를 섬길 것이라 하여 553년(진흥왕 14)에 늪지 2만5000평을 메워

공사를 시작해 646년(선덕여왕 15)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몽골의 칩입 때에 절과 함께 9층목탑도 소실되었다고 원장님은 전한다....

 

 ↑ 9층목탑 추정도감비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이곳에 근사한 9층탑을 다시 세우면 어떻겠느냐고 말했으나 전문가들은 탑이

어떤 형태인지 역사적 자료가 없어 추정만으로는 건립할수 없다하여 무산되었다고 전한다. 

사진은 추정 탑의 모습을 그려 세운 도감도비다.

 

 ↑ 9층목탑에 대한 안내문

목탑에 대한 상세한 안내문이다. 그 당시 목탑의 추정형태,규모,위치 등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 금당터 안내

 금당터는 황룡사 본당(대웅전) 양쪽 옆에 각각의 법당을 세운터를 말한다.

 

  ↑ 강당터

절 맨앞쪽에는 탑을,중앙에 대웅전(법당) 뒤에는 강당을 세운다. 그 다음 사찰을 둘러싼 회랑이 맨 뒤에 있다고 한다.

사진은 당시 강당을 세웠던 터이다. 현재는 곳곳에 기둥을 세운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 불상 주춧돌과 감나무

 황룡사지 자리엔 마을이 있었는데..발굴 관계로 모두 이주시키고 문화재 발굴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저 멀리 까치가 둥지를 튼 감나무가 이곳이 당시 마을이였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원장님은 전한다.

 

 ↑ 황룡사지 발굴 조감도앞에서

황룡사지 답사를 마치고 분황사로 향해 가는 길목에 황룡사지 발굴 조감도가 우뚝서 있었다.

잠시 원장님이 우리 일행을 불러 세우고 조감도에 대한 설명을 하고있는 모습이다. 

 

  ↑ 황룡사지 발굴 조감도

당시 황룡사 절터 배치도가 그려져 있는 발굴 조감도이다.  

붉은 표시로 현위치라 쓰인곳이 발굴 조감도(사진)가 세워진 위치, 즉 원장님이 설명하고 있는 위치이다.

 

  ↑ 황룡사지 조감도옆에 세워진 안내문

조감도 옆에 세워진 황룡사지 안내문이다. 황룡사 터에도 설명문이 있었는데...

아마 서문(뒤쪽)에서 들어오는 관광객을 위해 설치한듯 했다.

 

  ↑ 황룡사지 앞 겨울초

 황룡사지 발굴에 대한 설명을 들은 우리일행은 분황사로 향했다. 가는 길목엔 겨울초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연초록 빛을 발하며 생동감을 안고 유채꽃으로 화할 꽃피는 봄을 기다리며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 구황동 당간지주/황룡사지 앞

일행들은 모두 앞서가고 나는 겨울초 밭에 홀로선 당간지주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 카메라에 담았다.

당간주 사이 아래에 엎드려 있는 짐승같은 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발길을 돌릴수 밖에 없었다.

 

 ↑ 당간지주에 대한 안내문

 길가에 세워진 당간지주에 대한 설명문이다.

단간지주가 무엇인지는 부석사 답사에서 설명들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였다.

 

 ↑ 분황사 일주문

당간지주를 지나 50여m 거리에 분황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분황사(芬皇寺)라 멋지게 갈긴 붓글씨가 가슴에 와 닿는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리라..

분황사란 문패를 달고있는 일주문이 제일먼저 나를 반긴다.

 

 ↑ 분황사 대종각

 일주문을 들어서자 바로 우측에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한 대종각이 범종을 매달고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분황사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되었으며, 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일찍이 원효대사는 이곳에 머물면서〈화엄경소 華嚴經疎〉를 썼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고,  그뒤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승당·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화쟁국사비편(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석정(石井)·석등·건물지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 분황사 3층석탑/전탑/모탑

분황사에 있는 현존하는 신라시대의 유일한 탑으로. 국보 제30호. 높이 930cm. 분황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3층뿐이다. 단층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으며,

그 위에 화강암으로 탑신받침을 마련하고 탑신을 쌓았다.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실(龕室)을 만들고

문비(門扉)를 달았는데, 감실 속에는 불상 같은 예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중국의 톈룽산[天龍山] 석굴에 있는 수대(隋代)의 인왕상들과 비교된다.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석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조각솜씨가 부드럽고 사실적이다.

옥개부(屋蓋部)는 전탑(塼塔) 특유의 구조인 상하에 층단(層段)이 있다. 1915년 수리 때 2층과 3층 사이의 석함(石函) 속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은제사리합, 구슬류, 금동제장신구류 등이 수습되었다 한다.

 

 ↑ 분황사 3층석탑 안내문

 석탑 모서리에 세워진 분황사 석탑에 대한 설명문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처음에는 7층이나 9층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몸체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을 지키는 인왕상이 새겨져 있다.

탑에서 나온 사리함에는 가위,금,은합,숭령통보,상평오수 등이 등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 분황사 3층석탑에 대한 강의/원장님

 분황사 3층석탑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원장님과 귀 기울이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다.

경주 지방에 벽돌을 만들 적당한 흙이없어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탑을 세운탓에 일본인에 의해 모전탑이라 불러졌으나

지금은 석탑/전탑으로 부르고 있다며 원장님은 전한다. 

 

 ↑ 열정적 강의/창원문화원장

창원문화원 박동백 원장님은 대단하신 분이신것 같다. 지긋한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지칠줄 모르는 체력에 해박한 지식에다 뛰어난 유머 감각까지 겸비해 오늘도 우리 37기 생들에게 

영양가 만점의 즐거움을 전하고 있다.

 

 ↑ 강의에 귀 기울이는 동호형님

37기 동기생의 영원한 맏형! 언제나 자상한 성품으로 곁에 머물고 있는 존경스런 동호형님!!

 오늘따라 원장님의 강의에 귀 기울이며 경청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인다.

몰래 카메라에 찍힌줄을 알고있느지 모르는지 강의에만 열중이다.

 

 ↑ 3층석탑 측면 조각

 탑신 4면에는 각각 감실(龕室)을 만들고 문비(門扉)를 달았는데, 감실 속에는 불상 같은 예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문 좌우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하여 끼운 인왕상(仁王像)이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3층석탑 앞에서

 언제나 처럼 카메라 하나들고 이곳저곳 열심히 담고 있는 밝은표정의 젊은여자 동기생!! 

석탑을 배경으로 한 멋진 포즈를 카메라에 담았다.

 

 ↑ 서라벌 순부두집

 분황사 답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보문단지 가는 길목에 자리한 서라벌 순두부 집을 찾았다.

답사여행에서 처음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고 현지에서 식당을 이용한 점심식사였다.

미리 예약한 탓에 금방 따뜻한 순두부에 공기밥 한그릇이 나왔다.

여기에 회장님이 준비한 듯한 소주 맥주 까지 한잔씩 곁들이니 모두들 세상 부러울게 없는듯 

정겹게 식사하는 모습들에서 사람 살아가는 맛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작은 일에도 행복을 느낄수 있다는 진리를 새삼 깨닳고 있는 나였다.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사를 마치고 입가심으로 모두들 커피한잔 받아들고 서로 정담을 나누고 있는 우리 동기생들이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감은사지

 점식식사를 마치고 다음 답사지인 감은사지를 향해 출발했다.

보문단지,댐을 지나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30여분 달린끝에 감은사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3년전에 이곳에 들린적이 있어 낫설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주차장이 새로 마련돼 있었고 그 당시 좌측의 탑 보수가

한창이였는데...지금은 주차장에서 바라본 2개의 탑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 감은사지로 향하는 동기생들

먼저 감은사지에 올라 바라본 주차장에서 걸어오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도 보기 좋다.

 

 ↑ 감은사지(感恩寺址) 3층석탑/사적 제31호

이 탑은 감은사지에 올라서면 우측에 서 있는 탑의 모습이다.

신라 30대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한다.

금당과 회랑의 2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 감은사지 주춧돌
감은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감은사 터를 말한다. 원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뒤에는 연대산이 감싸고 있고

사찰 앞쪽으로는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발굴 당시이곳은 마을로 주민들이 주춧돌 아래 빈 공간에 고구마 등을 저장하며 생활했다고 전한다.

 

  ↑ 경청하는 동기생들

감은사지 주춧돌에 모두 앉아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이다. 원래 문화재를 깔고 앉으면 안되는 것인데...하면서도

상황이 상황인만큼 어쩔수 없는듯 모두 주츳돌 위에 앉았다..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강당지(講堂址)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어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회랑(回廊)은 강당의 정면어간(正面御間)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사지는 쌍탑식 가람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탑 역시 우리나라 석탑의 대종을 이루는

신라양식의 석탑 중 양식적인 완성을 보이는 가장 오랜 것이다.

 

  ↑ 여유로운 모습

 원장님은 지금 문무왕의 유언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건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 머금은 여유로운 자태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여자 동기생!!

 

원장님이 설명하는 신라 문무왕의 유언은 이렇다

산곡은 변천하고 인간세대는 옮겨가니 중국 오왕의 북산 무덤에 금황로의 광채를 볼수 없으며

위왕의 서능을 바라보는 것도 오직 동작대의 이름만 듣게된다. 옛날 만기를 다스린 왕도 한줌의 흙무덤을 만들어

초부의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부르고 토끼와 여우는 그곁에서 구멍을 판다.

자재 낭비말고 전쟁에 시달린 백성 괴롭히지 말고 10일후에 궐 밖에서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라

 

  ↑ 감은사지 강당터

 금당터(법당) 뒤에 있는 강당터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원장님이시다.

그 당시 강당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 감은사지 3층석탑/좌

감은사지 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은 국보제112호이다.

동서로 마주 서 있는 이 탑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602)에 세워진 석탑이다.

 

화강암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方形) 중층(中層)의 탑으로 동서 양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를 보인다.

상층기단은 면석을 12매로, 갑석(甲石)은 8매로 구성하였다.

탱주는 하층기단에 3주, 상층기단에 2주를 세웠다. 초층옥신(初層屋身)은 각 우주(隅柱)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은 각면이 한돌, 3층은 전체가 한돌로 되었다.

목조가구를 모방한 흔적을 보이며 옥개석 받침을 층단식으로 한 수법은 전탑(塼塔)의 전단계 모습을 추정케 한다.

기단을 이중으로 하는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이와 같은 양식은 이후로 한국 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 감은사지 3층석탑에 대한 설명

1960년 및 1996년 석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탑신에서 창건 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었으며,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안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탑의 전체 높이는 13.4m.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을 갖추고 있는데, 상· 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특히 옥개석의 경쾌한 미와 주위경관에 어울리는 비례가 잘 나타나 있다.

 

  ↑ 형님곁엔 언제나 예쁜 여자동기생들이

 원장님의 설명이 모두 끝나고 여기저기 사진찍느라 분주하다. 나 또한 동기생들 포즈따라 카메라 셔터를 눌려댔다.

하지만 동호형님 곁엔 언제나 예쁜 여자 동기생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부렵다. 난 언제 저렇게?

 

  ↑ 3층석탑앞에서/반림동 팀

감은사지를 뒤로하고 계단을 내리서려는 순간..스타 손께서 사진한장 부탁한다. 반림동 팀이라나...

탑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사람이 작게보여 아쉽지만 모두들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모두들 밝은 표정이 넘 보기좋다.

간만에 카패지기님도 함께했으니 더욱 빛을 발하고...헌데 스타 손은 없구나...

 

  ↑ 문무대왕 수중릉 조감도

감은사지를 뒤로하고 버스로 약 10분여 거리인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입구에 세워진 문무대왕 릉의 조감도와 설명문이였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大王巖)이라고 불렀다.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한편 바위의 안쪽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낸 것은 부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문무대왕 수중릉에 대한 설명문

 조감도 옆에 서있는 문무대왕 수중릉에 대한 설명문이다.

 

  ↑ 넘칠대는 파도/문무대왕 수중릉 앞

문무대왕 수증릉에 대한 설명을 읽고 바닷가에 들어서자 하얀 물거품을 품은 거센 파도가 밀려와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져 가는 풍경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 파도는 하얀 물거품을 남기고

 파도가 쓸고간 자리엔 하햔 물거품만이 파도의 흔적을 말해주듯 모래위를 덮고 있었다.

 

  ↑ 물거품이 사리지는 장면

 물거품이 사라지기가 바쁘게 또 다른 파도가 밀려와 햐얀 포말을 뿌리고....

 

  ↑ 겨울바다와 여인

 멀리 대왕암 앞쪽에선 원장님의 강의가 시작되고 있는듯 했지만 겨울바다를 만난 일행들..우와~~ 하는 함성에

공부는 뒷전이고 파도가 밀려올때 마다 즐거운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우리 상남동 반장여인!..이 시간만큼은 눈에 뵈는게 없는듯...어린 소녀마냥 깜찍한 포즈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 대왕암과 하얀 물거품

대왕암과 푸른바다, 그리고 하얀 물거품이 한데 어울린 한폭의 그림같은 아름다운 풍경...

자연이 아니고서는 감히 흉내낼수 없는 신비로움이 아닐수 없다. 

 

  ↑ 찌든 마음까지 파도에 씻어내고

 파도가 밀려올때 마다 뽀얀 우유를 뿌린 듯한 하얀 물거품...도심의 찌든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한방에

쓸어내는 듯한 시원함이 가슴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 형님 복도 많으셔...

모두들 공부는 않고 사진찍기가 바쁘구나...나 또한 닥치는 대로 동기생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처럼 포근한 날씨에 겨울 바다를 만나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간듯 즐거운 모습들이다.

한데...병준 성님!! 복도 많으셔...미녀들 세명씩이나... 나도 다음엔 함 낑가 주이소...

 

  ↑ 거침없는 파도소리

 파도 소리를 듣다보니 부딛쳐서 깨어지는 물거품만 남기고...로 시작되는 배호씨의  "파도"란  노래가 생각났다.

 

  ↑ 파도넘어 끝없는 수평선이

하얀 물거품과 파도 뒤로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이 자로잰듯 선명하게 그어진 풍경...

또한 신비로움이 아닐수 없구나.

 

  ↑ 물거품과 어촌풍경

 대왕암 쪽만 바라보다 좌로 고개를 돌리니 하얀 물보라와 어울린 어촌풍경이 엄마품속 같이 평화롭게 다가왔다.

 

  ↑ 노도와 같은 파도

이제 떠나야 할 시간...돌아서려는 귀전뒤로 노도와 같은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에 다시한번

바라본 풍경은 가히 천하일품이였다.

 

  ↑ 대왕암을 뒤로하고

 대왕암아 잘있거라..파도야 잘있거라..너는 어제도 오늘도 아니..내일도 변함없는

멋진 모습으로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을 유혹 하겠지?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없이 떠나지만 너에 대한 그리움 한자락 살포시 내려놓고 떠나마..

우리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 경주박물관

대왕암을 출발한 버스안에서 이야기 꽃을 피운 사이 경주 박물관에 도착했다.

벌써 서쪽으로 많이 기운 햇살은 황금빛을 발하며 황혼이 가까워 옴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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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박물과 성덕대왕 신종앞

 먼저 성덕여왕 신종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러차례 와본 곳이지만 박물대 생으로 찾은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 성덕대왕 신종에 대한 강의/원장

성덕여왕 신종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원장님이시다.

이 종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 성덕대왕 범종안내문

성덕대왕 신종앞에 있는 설명문이다. 설명문은 탐방객이 보기싶게 사방 각 1개씩 붙어 있었다.

이 종은 처음 봉덕사(奉德寺)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施主)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봉덕사가 폐사(廢寺)된 뒤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鍾閣)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 성덕대왕 신종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달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종의 입둘레는 팔능형(八稜形)이고 종머리에는 용머리와 음관(音管)이 있다.

특히 음관은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한다.

 종 몸체 상하에는 견대(肩帶)와 구대(口帶)가 있고 견대 밑 네 곳에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 안에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몸체의 좌우에는 이 신종의 내력을 적은 양주(陽鑄) 명문(銘文)이 있으며 앞뒤에는 두 개의 당좌(撞座)가 있고,

유곽 밑 네 곳에는 구름을 타고 연화좌(蓮華座)에 앉아 향로를 받는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이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 성덕대왕 신종 용뉴

종을 매달있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로 앞으로도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 선덕대왕 신종 용류와 비천상

 비천상이란 하늘에 살면서 하계 사람과 왕래한다는 여자 선인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신종 곳곳에 비천상이 새겨져 있었다.

  ↑ 선덕대왕 신종앞에서

신종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회장님이 신종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이 있다고 외친다. 남는게 사진밖에 없다나...

맞는 말이다. 아마 졸업날이 가까워 오면서 모두들 아쉬움이 더했을 것이다.

 

 ↑ 다보탑과 석가탑 모형 

우리 일행 몇명은 박물관 내부는 여러번 다녀간 터라 외곽을 돌면서 추억을 담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사진은 불국사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의 모조품으로 모양,크기도 똑 같다.

 

   ↑ 문화유적들

 다시 우로 돌아가 보니 연꽃 무늬의 둥근 석판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아마 경주시내에 산재해 있던 문화재를 이곳 박물관으로 옮긴것이 아닐까 짐직된다.

 

 ↑ 삼층석탑

 이 삼층 석탑은 모조품이 아니다. 시내 어디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그냥 멀리서 모습만 카메라에 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 다정한 포즈/도대체 어떤사이 길래...

회장님!! 도대체 이 어여쁜 여자 동기생과는 어떤 사이길래...

영원한 동기생이기에 이런 포즈도 가능한 것이겠지...다정스런 포즈..꼭 연인같은 느낌...너무 보기 좋은 그림이다.

 

  ↑ 박물관 본관모습

 돌아 나오면서 경주 박물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경주 박물관은 1926년에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설립되어 광복후 국립박물관으로 경주분관으로 있다

1975년 경주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한다.박물관안에는 경주 일원에서 나온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 잘생긴 모과가 주렁주렁

박물관 옆을 지나다 노랗게 익은 잘생긴 모과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를 발견하고 무조건 카메라를 들이댔다.

모과는 못생겼다 그 누가 말했던가? 못생긴 과일에 비유되었던 모과..이제 그 말은 옛말..

너무 곱고 잘 생긴 모탐스런 모과였다.

 

 ↑ 모과나무 앞에서

마침 이곳을 지나던 동기생들도 너도나도 사진한장에..카메라 셔터를 눌려 얻은 멋진 사진이다.

모과나무를 배경으로 다정스럽게 선 여인의 고운 모습에서 스타가 따로없구나...

  

 ↑ 모과나무를 뒤로하고
 다시한번 탐스런 과를 바라보며 일행들은 박물관을 뒤로하고 경주 답사를 모두 마쳤다.

무슨일이던 지나고나면 아쉬움이 남는법이라 했던가?.

좀더 꼼꼼하게 관찰하지 못한점과 김유신 장군묘 답사일정이 금번 답사에서 빠져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어느때 답사보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것은

이제 졸업날이 가까워 지면서 앞으로 동기생들과 함께할 공식적인 답사 만남은 다음주

한번뿐이란 절박함 때문이리라....

하지만 동기생들과 함께한 경주답사 여행은 또 다른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사진/글 : 산과벗(김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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