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한이서린 장릉과 청령포
창원 산사랑산악회 새해 안전기원 시산제를 겸한 일출산행을 마치고...
2017년 1월1일 새해 첫날 민족의 영산 태백산 정상에서 맞이하는 장엄한 일출을 보고 귀가길에 비극적인 왕으로 기록된
단종의 한이서린 영월 장릉과 청령포를 찾았다.
장릉(莊陵)은 조선 단종의 무덤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상왕이 되고,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지금의 강원도 영월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0월 24일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사망할 당시 고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시신을 거두지 못했고 시신은 그대로 강물에 떠다녔는데, 호장 엄흥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이에 따라 장릉은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그 후 59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년)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내 지키게 했으며, 12월 15일 처음으로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다. 치제를 맡은 것은 우승지 신상(申鏛)으로, 김안국과 함께 파견되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온 신상은 당시 노산군(단종)의 묘는 영월군에서 서쪽 5리쯤 떨어진 길 옆에 있었는데, 봉분 높이가 겨우 두 자밖에 되지 않았고 주변에는 민간의 여러 무덤들도 가득했지만 영월 사람들은 그 무덤을 군왕의 묘라 부르며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선조 13년(1580년)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숙종 24년(1698년)에 비로소 단종(端宗)이라는 묘호가 올려지고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영월에 있던 무덤도 장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1]
경내에는 정자각, 단종비각, 영천, 배식단, 재실, 홍살문 등이 있으며, 울창한 노송의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능의 양식은 왕명에 따라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4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망주석(望柱石) 2개, 문석(文石) 2개, 석수(石獸) 여러 개가 있다.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2]
다음은 2017년 1월1일 태백산 일출산행을 마치고 영월에 들려 장릉과 청령포를 둘려보며 담은 사진들이다.
엄흥도 (嚴興道, ?~?) 는 조선 전기의 문신, 충신이다. 본관은 영월이다.
단종의 시신을 매장하였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영월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엄흥도는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 등용되었고, 영조 때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에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그리고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도 등재 되었다.
↑ 장릉 매표소
↑ 솔잎가든 (이곳에서 점식식사)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는 조선 단종의 유배지이다. 단종은 세조 찬위 후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암살되었다.
2008년 12월 26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림이 270° 돌아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영월 청령포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남한강 상류에 있는 지명. 강원도 기념물 제5호.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 북, 서쪽은 서강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 지형이다. 이곳은 1457년(세조 3) 세조에 의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청령포 망향탑
↑자규루
자규루는 세종10년(1428) 창건. 원래 이름은 매죽루(梅竹樓).단종이 홍수를 만나 청령포에서 광풍헌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이 누각에서 자규사, 자규시를 읊은 이후 자규루로 불린다고...광풍헌은 세조3년(1457) 10월 24일 사약을 받은 곳. 끝까지 거부하다가 목이졸려 죽은 그날의 기록이 자세하다
# 단종의 자규시(子規詩)
一自寃禽 出帝宮 (일자원금 출제궁) 원한 맺힌 새가 한 번 제궁을 나온 후
孤身隻影 碧山中 (고신쌍영 벽산중) 외로운 몸의 한 그림자가 푸른 산중에 있네
假眠夜夜 眠無假 (가면야야 면무가) 밤마다 선잠조차 이룰 수 없고
窮恨年年 恨不窮 (궁한년년 한불궁) 깊은 한은 해마다 다하지 않네
聲斷曉岑 殘月白 (성단효잠 잔월백) 소리 그친 새벽 봉우리엔 남은 달빛 밝은데
血流春谷 落花紅 (혈루춘곡 낙화홍) 피 뿌린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이 붉네
天聾尙未 聞哀訴 (천롱상미 문애소) 하늘은 귀먹어 오히려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何奈愁人 耳獨聽 (하내수인 이독총) 어찌하여 근심 어린 내 귀만 유독 밝은가
-기태완 지음 <천년의 향기 한시 산책> 에서
# 단종의 자규사(子規詞)
月白夜, 蜀魂啾 (월백야촉혼추) 달 밝은 밤 두견이 우는데
含愁情, 依樓頭 (함수정의루두) 근심 품고 누대 앞에 기대었네
爾啼悲, 我聞苦 (이제비아문고) 네가 슬피 우니 나는 듣기가 괴롭구나
無爾聲, 無我愁 (무이성무아수) 네 울음소리가 없다면 나도 근심이 없으련만
寄語世上苦榮人 (기어세상고영인) 세상의 괴로운 사람들이여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신막등춘삼월자규루) 부디 춘삼월 두견이 우는 누대엔 오르지 말게나
-기태완 지음 <천년의 향기 한시 산책>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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