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와대의 구분(世와代)
세와 대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많고 각 문중별로 다른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본 자료를 기준으로 제일 논리적인 자료가 있어 그중 두가지를 올려 봅니다
<아래 두분의 논지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고 우리 집안에서도 사용예를 보면 동일하게 적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성균관에서도 수많은 논의를 거쳐 이 입장을 정식 채택하였습니다>
* 世와 代는 동일하다. 즉 世 = 代, 世祖 = 代祖, 世孫 = 代孫 이다
* 世/代는 기준이 되는 사람을 넣고 계산한다
(예)나는 증조부로부터 4세/대이다. 증조부는 나의 3세/대조부가 되신다
* 世祖/代祖, 世孫/代孫 는 기준이 되는 사람을 빼면 된다
어제 2017. 11. 19(일) 뿌리공원 창원김씨 유래비 제막식 이후 식사장소에서도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여 설명해 드렸으나 수긍하지 않아서 논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유래비 서문에서 "창원김씨의 시조는 김을진(金乙軫)이다. 그의 처음 이름은 김광준(金光俊)으로,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45세손이며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아들인 영분공 김명종(永芬公 金鳴鍾)의 17세손이다" 란 기술을 놓고 왜 45대손으로 해야지 45세손으로 했느냐 는 것이다 (참고 : 우리 족보에서 보면 을진은 알지로부터 46세/대이다. 즉 알지의 45세/대손이다)
이하 1. 2는 성 백 효 (국역연수원 교수)와 李炳赫(釜山大 名譽敎授․文學博士) 의 글입니다
1. 世 와 代의 정의
성 백 효 (국역연수원 교수)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은 의외로 많다. 세(世)와 대(代)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또한 그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기불대수(己不代數)라 하여 자신(본인)은 대수(代數)에 넣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즉 대는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반면, 세는 자신까지 포함하여 계산한다는 주장이다.
어떤 문중(門中)에서는 종보(宗報)에 이러한 내용을 게재하여 더욱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대와 세는 똑같은 뜻으로 원래는 세자(世字)를 더 많이 사용하였는데, 당나라 때에 태종(太宗)의 이름이 세민(世民)이므로 세자(世字)를 휘(諱)하여 대자(代字)로 통용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기불대수란 말은 출전에 보이지 않으며, 단지 우리나라에 족보가 크게 성행하면서 족보의 세수(世數) 표시를 보고 지어낸 말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 족보는 1면(面)을 6단(段)으로 나누고 맨 아랫 단에는 자손의 이름만을 기록하였다가 다음 장의 상단(上段)에 다시 그의 이름을 쓰고 생졸(生卒)과 이력(履歷)을 자세히 기록하여, 면마다 5대(代)씩 수록함으로써 대수를 계산하기 편리하게 하였으며, 시조(始祖)를 1세로 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고조(高祖)로부터 자신까지 세어오면 5세가 되는데, 실제로는 고조가 4대조가 된다.
즉 시조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26세라면 시조는 당연히 25대조가 되고, 자신은 25대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와 대가 달라서가 아니요,뒤에 조(祖)나 손(孫)을 붙였기 때문에 한 대가 줄었음을 알아야 한다.
족보의 세수(世數)는 객관성을 강조하여 시조를 1세로 한 반면, 몇 대조 또는 몇 세조라고 칭하거나 몇 대손 또는 몇 세손이라고 칭하는 것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후손인 본인을 기준하여 주관적으로 지칭하기 때문에 한대가 줄어드는 것이다.
조(祖)는 자신의 선조란 뜻이요, 손(孫)은 선조의 후손이란 뜻이므로 자신이나 선조는 자연 대수에서 제외되게 마련이다.
옛날 어른들은 자신의 성(姓) 아래에 씨자(氏字)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족보에는 전주리씨 족보(全州李氏族譜)니, 김해김씨 족보(金海金氏族譜)니 하여, 씨자를 붙이는데, 이 역시 객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자신의 선조를 남에게 말할 경우에는 몇 대의 비선조(鄙先祖)라고 칭하는데 이는 자신을 위주로 한 주관적 호칭이다.
그러므로 25대조는 바로 25세조이고 25대손은 바로 25세손일뿐,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만일 4대조인 고조를 5세조라고 칭한다면 이는 자신까지도 선조로 친 것이 되며, 4대손인 고손(高孫)이 자신을 5세손이라고 칭한다면 이는 고조까지도 자손으로 친 것이 된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망발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일찍이 이러한 오류를 지적하여 간행물에 발표한 적이 있으며 최근에는 전통문화연구회의 홈페이지에 이것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그랬더니, 항의성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만큼 관심이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그만큼 잘못 알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한 번 잘못 인식된 지식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가 보다. 상당히 유식한 분인데도 자신의 잘못된 상식이 옳다고 고집한다.
그분들의 논리대로라면 조(祖), 자(子), 손(孫)이 2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조, 자, 손은 엄연히 3대이지, 2대가 아니다.
3대와 3세가 어떻게 다른단 말인가. 백대(百代)와 백세(百世), 만대(萬代)와 만세(萬世) 역시 동일한 의미이지, 백세는 99대이고, 만세는 9천 9백 99대가 아니다.
단지 예전에는 몇 세조나 몇 세손이라는 단어보다 몇 대조니 몇 대손이니 하는 단어를 더많이 사용하였는데, 이제 족보의 세(世) 아래에 손자(孫字)를 붙임으로 말마암아 26세는 바로 26세손으로 인식하여 이러한 혼란이 야기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 대손과 세손이 똑같은 실례를 제시하기 위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저서인 우계속집(牛溪續集)6권 잡기(雜記)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우계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 성여완(成汝完)이 넷째아들인 낭장(郎將) 석번(石번)에게 준 문기(文記)가 있는데, 말미에 '부 보국숭록대부 검교문하시중 성(父 輔國崇祿大夫檢校門下侍中 成)'이라고 쓰고 수결(手決사인)을 하였으며, '모 경안택주 나씨(母 慶安宅主 羅氏)'라고 쓰고 붉은 도장을 찍었는바, 우계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고, "수백년전 선조의 손때가 묻은 문기를 얻어 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만력(萬曆) 병자년(선조 9, 1576) 10월27일에 7세손 혼(渾)은 삼가 쓰다."라고 부기(附記)하였다.
여기의 7세손은 문정공 성여완의 7세손이라는 뜻이다.
우계의 가계(家系)를 살펴보면 여완(汝完), 석인(石연), 억(抑), 득식(得識), 충달(忠達), 세순(世純), 수침(守琛), 혼(渾)으로 이어져 총 8세이지만 우계는 이처럼 7세손이라고 표현하였다. 설마하니 대학자인 성우계가 대수를 잘못 표시할 리가 있겠는가.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시조로부터 26세라면 '시조부터 26세'라고 말해야 할 것이요 '26세손'이라고 칭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기바란다.
2. 세, 세손, 세조, 대, 대손, 대조 논리전개
- 四代奉祭祀는 누구까지의 제사인가
李炳赫(釜山大 名譽敎授․文學博士)
이런 상식적인 문제를 제목으로 내세워 글을 쓰려니 서글픈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요즘 와서 세상 사람들이 옛 예법에 대해 하루가 다르게 무식해 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상식적이었던 것도 지금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4대봉제사란 뜻이다. 4대봉제사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까지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조상에 대해 지내는 제사에 자신까지 여기에 포함시킬 수 없으니 당연히 4대봉제사가 된다.
전통 제례에서 고조할아버지까지는 매년 기제사(忌祭祀)를 지내지만 고조할아버지의 아버지, 즉5대조가 되면 묘제(墓祭)를 지내는것이 상례다.
여기서 고조할아버지를 왜 5대조라 하지 않고 4대조라 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논리대로 하면 이는 계수(計數)의 원리에 합당하는 과학[數理]의 문제로 자신이 대수(代數)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고조할아버지까지의 제사는 4대봉제사가 아니라 5대봉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자신을 조상의 대수에 넣어야 한다는 뜻이다. 참으로 해괴(駭怪)한 말이다.
옛 선현들은 수리에 무식해서 고조할아버지까지의 제사를 5대봉제사라 하지 않고 4대봉제사라 했단 말인가?
이런 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수리를 따졌지만 사실은 수리도 모르고 국어의 논리도 모르는 것 같다.
나(0대)→아버지(1대조)→할아버지(2대조)→증조할아버지(3대조)→고조할아버지(4대조)
수리를 따지는 사람은 1(일)만 수리인 줄 알았지, 0(영)에서 수리가 시작되는 것은 모르는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4대봉제사라고 할 때에는 나의 제사를 이 대수에 넣을 수 없으니 나를 0(영)대로 잡은 것이다.
예법(禮法)에서 논리성과 합리성을 따지는 문제는 선현들이 현대인보다 훨씬 더 현명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상과 후손의 관계를 두고 말할 때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제3자의 입장에서 조상과 후손을 두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본인이 주체가 되어 선조 또는 후손과의 관계를 말하는 경우다. 마치 일상 생활언어에서 지칭(指稱)과 호칭(呼稱)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
전자처럼 제3자가 되어 객관적인 사실을 두고 보면 나에게서 고조할아버지까지는 5대가 된다.
하지만 후자처럼 본인이 주체가 되어 조상의 대수를 헤아리면 고조할아버지까지는 4대조가 된다. 자신을 조상 대수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손님 9명과 함께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거기에 사람이 몇 명이 있느냐”고 하면 열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나에게 손님이 몇 사람 있느냐고 물으면 아홉 사람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손님이 아니기 때문에 손님의 숫자에서 제외 되어야 한다.
몇 대조냐, 몇 대(세)손이냐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즉, 몇 대조냐 하는 것은 조상의 대수를 헤아리는 것이므로 자신은 이 대수에 넣어서 계산해서는 안된다.
이와 반대로 몇 대(세)손이냐 할 때는 후손의 대수를 헤아리는 것이므로 그 기준이 되는 할아버지는 여기에 계산되어서는 안 된다.
즉 기준이 되는 할아버지가 자손이 될 수 없고, 내가 조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보면 몇 대조, 또는 몇 대(세)손이라고 할 때 주체가 되는 사람은 대(세)수에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런 논리를 모르고 과학이 어떠니, 수리가 어떠니 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다음 세(世)와 대(代)에 대해서 묘제의 실례를 들어가면서 확인해 보자.
묘제의 대상은 오대조(五代祖) 이상에서 시조까지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조까지는 가정에서 기제사로 지내고 고조의 아버지, 즉 오대조부터는 묘제를 지내는데, 여기서 몇 대조, 몇 세손이라 하는 세(世)와 대(代)가 문제된다.
본래 세(世)와 대(代)는 같은 뜻으로 사용해 왔는데, 후에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인 세(世)자를 당나라 사람들이 바로 읽을 수가 없다고 하여 세(世)자 대신에 대(代)자로 바꾸어 썼다.
세(世)와 대(代)의 쓰임을 정확히 알려면 이 말이 쓰이던 역사적인 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청(淸)나라 선종(宣宗)의 도광(道光) 26년(1846)에 편집하여 지경학재장판(知敬學齋藏板)에서 출판한 《피휘록(避諱錄)》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중국 역사상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 이것을 감히 바로 읽지 못하고 달리 읽는 것을 고증하여 보인 것이다.
이 책의 3권에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을 당시 사람들이 다른 글자로 고쳐서 읽는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당태종의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기 때문에 당나라 사람들은 이를 감히 그대로 읽을 수 없어 모든 글에서 세(世)자는 대(代)자로 바꾸어 읽었다. 이를 학술적인 용어로 피세작대(避世作代)라고 했다.
즉 세(世)자를 피해 대(代)자로 바꾸어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잘 다스려진 세상을 본래 치세(治世)라고 했으나 이를 치대(治代)로 고쳤다.
또 세종(世宗)은 대종(代宗)이라 고쳤다.
이처럼 세(世)자만 바꾼 것이 아니라, 민(民)자도 바꾸어서 본래 민부(民部)라 쓰던 것을 호부(戶部)라고 했다. 이때부터 몇 세(世)라는 말도 몇 대(代)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관례를 따라 세(世)와 대(代)는 아무런 혼란 없이 써왔다.
그런데 1960년대에 한갑수의 ≪바른말 고운말≫(1111~1112쪽. 책은 1968년 융문사에서 펴냈으나, 방송은 훨씬 그 이전에 있었음.)에서 잘못 방송되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世)는 위에서 내리칠 때 쓰이는 말이고, 대(代)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칠 때 쓰이는 말이란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아래에서 위로 올려칠 경우
고조의 아버지(五代祖) ← 고조(四代) ← 증조(三代) ← 조(二代) ← 부(一 代) ← 본인(대수에 넣지 않음)
② 위에서 아래로 내리칠 경우
고조의 아버지(一世) → 고조(二世) → 증조(三世) → 조(四世) → 부(五世) → 본인(六世)
와 같이 계산하여 몇 세손(世孫)이라고 할 때, 세(世)에는 자신까지 계산하고 몇 대조(代祖)할 때, 대(代)에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世)와 대(代)는 본래 같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한갑수의 말대로 하면 오대조(五代祖) 묘제(墓祭)에는 육세손(六世孫) ○○가 오대조(五代祖)에게 올리는 것으로 된다.
매스컴에 서 한번 잘못 보도된 이 주장은 오늘날까지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
과거에도 조상을 중심으로 내리 계산할 때는 오세손(五世孫)처럼 세(世)자를 많이 쓰고 자신을 중심으로 위로 계산할 때는 오대조(五代祖)처럼 대(代)자를 쓰는 경향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세(世)와 대((代)는 본래 같다.
따라서 오세손의 기점이 되는 할아버지는 오대조가 된다.
오대조(五代祖)라 하면 조상의 대수(代數)를 헤아리는 것이므로 기준점이 되는 자신은 대수에 넣을 수가 없다. 자신을 이 대수에 넣으면 자신이 조상의 대수에 계산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세손(五世孫)이라 하면 자손의 세수(世數)를 헤아리는 것이므로 기준 점이 되는 그 조상은 이 세수에 넣을 수가 없다.
그 조상을 이 세수에 넣으면 조상 이 자손의 세수에 계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몇 세손이라 하면 기준점이 되는 조상은 세수에서 계산하지 않고, 몇 대조라 하면 기준점이 되는 자신은 대 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祖)가 손(孫)의 세수(世數)에 계산 되고, 손(孫)이 조(祖)의 대수(代數)에 계산되기 때문이다.
마치 나의 오세손 하면 나를 손의 세수에 계산할 수 없고, 또 나의 오대조라 하면 나를 조의 대수에 계 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대불급신(代不及身)이라는 말도 대수를 계산할 때는 본 인을 대수에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世)와 대(代)는 본래부터 동일한 것이다.
다만 진시황이후 왕가(王家)에서는 세(世)를 쓰고, 사가(私家)에서 는 대(代)를 쓰는 경향은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가 같은 집에 살 때, 삼대(三代)가 한 집에 산다고 한다.
이때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요, 기점이 되는 몇 대조나, 몇 세손의 조(祖) 와 손(孫)이 붙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보아도 타당하고 우 리 역사상 고문헌에 아무런 혼란 없이 써온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묘제 축문에는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① 六世孫○○ 敢昭告于 顯五代祖考...
② 五世孫○○ 敢昭告于 顯五代祖考...
③ 五世孫○○ 敢昭告于 顯五世祖考...
④ 五代孫○○ 敢昭告于 顯五代祖考...
⑤ 後孫○○ 敢昭告于 顯先祖考...
위의 보기에서 ①은 한갑수식 발상으로 아예 말이 안 된다.
②, ③, ④는 어느 것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다만 ②는 내리 계산할 때는 ○世孫, 위로 계산할 때는 ○代祖라는 관례를 살려서 사용한 것이다.
③은 모두 ○世孫, ○世祖를 사용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④는 내리 계산할 때도 ○代孫, 위로 계산할 때에도 ○代祖라 한 것인데 이것을 사용하는 경향이 많다.
⑤는 이런 번거로운 것을 다 버리고 오대조(五代祖) 이상은 모두 선조라 쓰고 그 후손은 모 두 후손이라고 쓰는 것이다.
이는 우암(尤菴) 후손들과 노론계열에서 쓰는 예이다.
즉 서인 계열에서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②나 ④의 예문을 많이 사용하므로 대중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이 세(世)와 대(代)에 대해서 필자의 족질(族姪) 이성형(李星衡)이 의문을 가지기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원론적인 것만 대충 말해 주었더니, 그는 이것을 더 발전시켜 정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대부분 이를 시인하려 들지 않더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들이야 믿든지, 말든지 더 이상 설득하려 들지 말고 과거 우리 역사상 쓰인 사례만 조사하여 보이고 더 이상 논란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 후에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세(世)와 대(代)》라는 조그만 책자를 만들어 성균관을 위시해서 전국 유명 도서관에 기증했고, 인터넷으로도 서원, 향교, 전례원, 각문중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알렸더니 그 사례를 보고서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있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예시한 것 중에 우리 가문의 일과 관계있는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기로 한다.
①계손(繼孫=敬憲公)→②지시(之時)→③공려(公礪)→④사필(士弼)→⑤우인 (友仁)→⑥상의(尙毅)→⑦지안(之安)→⑧하진(夏鎭)→⑨익(瀷=星湖)
위의 표는 실학자인 성호 이익선생의 계보이다.
보다시피 경헌공과 성호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두고 보면 9대이다.
하지만 이남규(李南珪, 철종6 1855~1907)선생은 경헌공을 모신 구봉사(龜峰祠) 중수기문을 쓰면서 경헌공의 8세손 성호 이익이라고 했다.
이남규선생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한말 의사(義士)인 동시에 유학자이다. 이런 분이 성호선생의 가계와 대수를 잘못 알고 썼을 리가 없으며 설령 잘못 알고 썼더라도 그 후손들은 그것을 모르고 이 기문을 내걸 리가 없다.
또 공자를 모신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학행(學行)과 덕망을 겸비한 사람이 별세하면 국가의 논의를 거쳐 이 문묘에 종사(從祀)했는데 이를 승무(陞廡)라 한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승무된 사람은 18현(賢)이다.
우리 역사상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유학자가 18명인 셈이다.
이성형은 그의 《세(世)와 대(代)》란 책에서 이 18현의 후손들이 몇 대조, 몇 대(세)손이라 쓴 사례를 권태현(權兌鉉)님이 조사한 표를 인용하여 모두 예시하여 보였다. 그 결과는 물론 위의 이남규선생이 쓴 예와 같았다.
이처럼 논리적인 측면이나 역사적인 사실이 명확한데도 이를 믿으려 들지 않는다니 한심스럽다.
더 나아가 오히려 과거의 것이 수리상(數理上)으로 보아 잘못되었으니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란다.
필자가 위에서 설명한 논리와 실례를 이해하면 이런 의문이 풀릴 것으로 믿는다.
이와 같이 논리가 정연하고 역사적으로 아무 혼란 없이 써 오던 것을 지금 와서 왈가왈부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
금까지 4대봉제사라 하면 고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이르는데, 나를 1대로 잡아야 한다는 사람의 주장을 따르면 고조까지의 제사를 5대봉제사라 해야 한다. 이 무슨 망발인가?
<여주이씨 司直公派>
글/부산대학교 한문학과명예교수 李炳赫문학박사
참고/여주이씨대종회“추읍산”창간호, 韓國傳統呼稱典禮硏究院 李星衡
<참고사항>
* 참고사이트 韓國傳統呼稱典禮硏究院 http://blog.daum.net/leesh2543/15681699
* 이 내용은 성균관에서도 토의를 거쳐 확정하였지만(아래 캪춰내용 참조) 지금도 성균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祖孫 호칭시 기준이 되는 사람을 포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있습니다(즉 父는 子의 2대조이고 子는 父의 2대손이라 주장함)
* 참고사이트 성균관 http://www.sk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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