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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찾아 나선 나들이~~

☞나의 포토갤러리/나의족보·삼현파

by 산과벗 2018. 11. 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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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찾아 나선 나들이~~

나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곤(坤)자 항열이며, 시조(始祖)이신 수로왕(首露王)의 69세손(孫)이며, 파시조(派始祖)이신

관(管)자 할아버지의 21세손(孫)이다.

가야국의 고도 김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구지봉 탐방에 이어 창원 대산면 유등리에 있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서원인

저산서원(楮山書院)과 파시조 문정공 관(管),명회재 문숙(文肅),둔옹 항(伉), 퇴평 서(湑)의 묘소를 찿아 김해 구지봉을 출발했다.

탐방 코스는

시조 수로왕릉-왕후릉-구지봉-저산서원-파시조,1세 김관,2세 김문숙,3세 김항의 묘소-모암재-4세 김서,5세 김극일의 묘소-

영모재-6세 김맹,김일손의 묘소-일손종택-7세 김준손의 묘소-8세 김대유의 묘소-유현재 순이다.

수로왕릉 탐방 기록은 양이 너무 많아 별도 기록으로 남긴다.


저산서원(楮山書院)

저산서원(楮山書院)은 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유등리 333-5 번지에 있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문중 서원이다.

김해김씨 삼현파의 중시조를 모신 1989년(乙未年)에 창건한 저산서원(楮山書院)이 넓은 들판에 세워져 있다.

문정공 정성헌 김관(文貞公 靖醒軒 金菅)을 주향으로 하여, 명회재 김문숙(明晦齋 金文淑), 판관 둔웅 김항(判官 遯翁 金伉)

현감 퇴평 김서(縣監 退平 金湑)를 배향하는 곳으로 향사일(享祀日)은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 : 첫 번째 丁일)이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대문의 모습이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대문에 경인문이라 새겨진 현판문이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대문을 들어서 정면에서 바라본 저산서원의 건물, 이곳에서 봄 가을 두차례 향사(享祀)를 지내는 곳이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현판문, 닥나무 저(楮)자인데 돼지 저(猪)자로 표기된 기록도 있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겠지만 힘이 있어 보인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대문에서 좌측 서채에서 담은 모습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과는 사뭇 다른 건축미..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정면 좌측에서 담은 건물 전체 모습이다. 


† 소원당(溯源堂)

저산서원(楮山書院) 홍인당(弘仁堂) 앞마당을 마주하고 있는 동재(東齋)를 소원당(溯源堂)이라 부르고 있다.

저산서원(楮山書院) 동쪽에 배치된 건물로 서재 소원당(溯源堂)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소원당(溯源堂)/입구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소원당(溯源堂)/현판문이다  


돈서헌(敦敍軒)

 홍인당(弘仁堂) 앞마당 좌측에 배치된 건물로 소원당(溯源堂)과 마주하고 있다


경덕사(景德祠)로 들어가는 문

 홍인당(弘仁堂) 뒷편 경덕사(景德祠)로 들어가는 담벽과 문이다.


경덕사(景德祠)/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경덕사(景德祠) 현판문이다



† 정면 좌측에서 바라본 경덕사(景德祠)의 모습이다.



경덕사(景德祠)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정문과 경덕사(景德祠) 건물이 한 건물처럼 보여 운치가 있어보인다,


홍인당(弘仁堂)마당에서 바라본 대문의 모습이다.


† 소원당(溯源堂) 뒷편에 자리하고 있는 2세 명회재 김문숙(明晦齋 金文淑), 3세 둔웅 김항(遯翁 金伉)의 비각이 있는 곳이다.


† 소원당(溯源堂) 뒷편 담 아래에 설치된 저산서원 창건 헌성 기념비다.


† 저산서원 창건 헌성록/저산서원을 건립할때 헌금을 낸 사람의 이름을 기록 해 놓은 비다.


명회재 김문숙(明晦齋 金文淑), 둔웅 김항(遯翁 金伉)의 지단이다


명회재 김문숙(明晦齋 金文淑)의 지단이다


명회재 김문숙(明晦齋 金文淑)의 지단(地壇)

명회재 김문숙(明晦齋 金文淑)의 지단(地壇) 뒷면이다




둔웅 김항(遯翁 金伉)의 지단이다

둔웅 김항(遯翁 金伉)의 지단 뒷면이다


†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저산서원을 모두 둘려보고 나와 밖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대문 앞 정각/고운 빛깔의 단청이 아릅담게 다가온다.


† 서원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판도판서 문정공 정성 김선생 신도비명" 이라 적혀있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대문 압 정각과 은행나무/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가 가을임을 말해주고 있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담벽/길게 뻗은 담벽이 저산서원의 규모를 말해주고 있다.


† 저산서원(楮山書院) 담벽/저산서원 들어가는 입구에서 바라본 서원의 모습이다.


판도판서(判圖判書) 김관(金管)묘(墓)

저산서원 탐방을 마치고 지척에 있는 나의 21대祖이자 김해김씨 삼현파 시조(始祖)이신 김관(金管) 할아버지의 묘소를 찿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시조 김관(管) 할아버지의 묘지가 있는 저소산 이다.

저소산은 저산서원을 둘려보고 서원에서 약600여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동산이며 도보로 약 10정도 걸리는 거리다.


† 문정공 김관(管) 의 묘(墓)

 삼현파 1세(世) 김관(金管)→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일명 삼현파(三賢派) 자(字)는 희범(希範), 호(號)는 정성헌(靖醒軒),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 초명(初名)은 관(館), "管"은 왕의 하사명(下賜名)이라 함.

뛰어난 경륜과 확고한 소신으로 진퇴를 분명히했던 판도판서(版圖判書) 지금의 재정경제부 장관(財務長官) 급의 벼슬이다



† 문정공 김관(管) 의 묘(墓)앞 상판문이다.

판도판서 시 문정 김해김공휘 관지묘 배 군부인 라주임씨 합부라 새겨져 있다.


† 문정공 김관(管) 의 묘(墓)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김관(管) 의 묘(墓) 아래 우측에 있는 묘 이다.


† 김관(管) 의 묘(墓) 아래 좌측에 있는 묘 이다.


† 김관(管) 의 묘(墓) 아래 묘 아애 우측에 있는 묘 이다.


† 김관(管) 의 묘(墓) 맨 아래에 있는 묘 이다.


† 김관(管) 의 묘(墓) 아래에 있는 묘 4기

묘비가 없어 누구의 묘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1,2묘가 김관의 아들  2세 김문숙의 묘, 3,4묘가 김관의 손자 김항의 아닐까 추척해 본다 

김문숙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김해 저소산 선영하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 김관(管) 의 묘(墓)는 동쪽 수로왕릉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저산서원과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둘려보는데 약 1시간 20여분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제 다음 탐방지인 모암재와 절효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청도로 향해 길을 떠난다. 소중한 것을 가슴에 담고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게 다가온다. 약 1시간여 만에 청도 모암재가 있는 각북면 명대리에 도착했다. 


 모암재(慕庵齋)

모암재(慕庵齋)는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선생의 호릉 따 지은 이름이며,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선생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자는 용협(用協)이고 호는 모암(慕庵)이며 사시호는 절효(節孝)로 본관은 김해(金海)로서 의홍현감 김서(金서)선생의 아들이며

1382년 (고려 우랑 8년)에 태어났고 야은 길재(治隱 吉再)선생의 문인이다.

모암선생은 탁영 김일손 선생의 할아버지이고 삼족당 김대유 선생의 증조부이다. 세분을 삼현선생 이라 일컫는다.


.


†  모암재 대문의 모습이다.

선생은 어릴 때 부터 총명하여 야은 길 재 (治隱 吉 再)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에 능통하여 학문이 매우 깊었다. 선생이 태어나기전 하루는 아버지인 현감 김 서 (熙監 金 서)선생의 광에 주자(朱子)가 현몽하여 말하기를 소학 책 한권을 건내주며 아들이 출생한 후에 이 책을 읽고 깨달어면 출천지 효자를 들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14개월만에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 모암재(慕庵齋) 대문 행원문이다.

절효 극일 선생은 벼슬이 통덕랑 (通德郎) 사힌부지평 (司憲府持平)을 지내고 후에 향리에서 아들 육형제의 교육은 물론 후학들의 계도에 힘써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선생이 1456년 (이조 세조 2년 丙予)에 돌아가시니 향년 75세였다. 집의 (執義 )가 증직되고 생전의 출전지효를 칭송하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저 향리유림과 제자들이 사시호를 절효(節孝)라 하였고 청도군 이서면 서원동에 있는 자계서원 (紫溪書際)에 봉안하고 향사 되었다


↑ 모암재(慕庵齋)

모암재는 절효 김극일 선생의 시제를 지내는 제실이며 대문을 들어서서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모암재(慕庵齋) 현판문 이다


모암재(慕庵齋) 동쪽 별당채로 4칸으로 되어있다.

모암재(慕庵齋) 동쪽 별당채와 우측 작은 건물이 화장실이다.


모암재(慕庵齋) 본 건물에서 바라본 대문의 모습이다.



모암재(慕庵齋) 서쪽 별당채로 4칸으로 되어있다.



모암재(慕庵齋) 대문 앞 마당 우측에 세워진 모암재 중수 헌성록이다.

모암재 중수시 헌금을 하사한 사람의 이름과 금액을  새겨놓은 비다.


모암재(慕庵齋) 담 밖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모암재(慕庵齋) 우측 뒷편/절효 선생의 묘지로 가는 길이다.

길 앞에서 좌로 꺽어 오르면 묘지이다.


절효 극일 선생의 묘지로 오르는 길이다.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선생의 묘(墓)



↑ 절효 선생의 묘역 입구에서 바라본 묘역 전경이다.


↑ 퇴평(퇴평(退平) 의흥현감(義興縣監) 김서(金湑)의 묘(墓)/묘역 맨위쪽에 있는 묘이다.

중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증손(曾孫)이며, 3세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아들이다. 자는 원윤(遠允)이고 호는 퇴평(退平)이다.


↑ 퇴평(退平) 김서(金湑)의 묘비석/현감 김해김공 지묘라 새겨져 있다.


↑ 퇴평(退平) 김서(金湑)의 묘 뒤편에서 바라본 묘역 전경이다.(가운데가 절효 극일 할아버지의 묘)


↑ 절효 극일(克一)선생의 묘(墓)


↑ 절효 극일(克一)의 선생의 묘(墓)지 앞 비석이다.


↑ 절효 김선생 지묘

↑ 절효 극일(克一)의 선생의 비석 뒷면


↑ 좌측에서 바라본 절효 극일(克一)의 선생의 묘(墓)지 모습이다


↑ 묘역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다시한번 모암재의 모습을 담았다

 

↑ 모암재 앞 마당의 단풍 떨어진 낙엽이 가을이 깊을 감을 말해주고 있다.

모암재 옆 관리인을 만나 잠시 묘지 및 모암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발길을 영모재와 김일손의 묘역이 있는

청도군 이서면 수야2리로 발길을 옮긴다.


영모재(永慕齎)

↑ 수야2리에 도착하여 네비 시키는대로 동네 안쪽까지 들어갔다 잠시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 동네 앞

김해김씨 문중에서 마련한 주차장에 도착했다.감나무 뒷편으로 보이는 기와집이 바로 "영모재"이며, 영모재 뒤편 소나무 숲이 묘역이다.



↑ 영모재(永慕齎) 대문(大門)/경현문이라 새겨져 있다.

 

↑ 영모재(永慕齎) 대문(大門)옆 좌측에 세워진 영모재 중건 헌성록이 새워져 있다.

↑ 헌성록 에서 담 너머로 영모재(永慕齎) 본체를 바라본 모습이다.



↑ 영모재(永慕齎) 대문(大門) 우측으로 돌면서 담 너머로 바라본 모습이다.


↑ 밖에서 우측으로 돌아 마침 관리인인듯한 노 부부가 고추를 늘고 있어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서 담은 사진이다.


↑ 영모재(永慕齎) 앞 마당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우측 담벽 아래에 영모재(永慕齎) 중건 비가 새워져 있다.


↑ 영모재(永慕齎) 현판문.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墓)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 입구이다.


↑ 영모재(永慕齎) 우측으로 길 따라 약 50여m지점에서 좌측으로 올라서면 묘역이 나온다.

묘역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맨 위쪽 묘가 김일손(金馹孫)의 부친인 사헌부 집의를 지낸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이며,

바로 보이는 맨 아래묘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다.


↑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우측에서 바라본 모습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아버지의 묘 이며 나에게는 16대조(祖) 이시다.


↑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본관(本貫)은 김해(金海). 자는 자진(子進) 호(號)는 남계(南溪).휘는 맹(孟)으로, 절효 김 극일(節孝 金 克一)선생의 아들이다.


1410년 (태종 10년) 8월 1일에 출생하여 1428년(세종 10년)에 진사(進士)와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성종의

오조(五朝)에 걸쳐 도총부 경력과 도찰방(道察訪) 및 사헌부집의 (司憲府 執義)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청덕선정으로 다스려 백성들의 칭송이 많았다. 

중종조에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경연춘추관사 (經筵春秋館事 )를 증하였다. 아들에 준손(駿孫), 기손(驥孫 ), 일손(馹孫)의 삼형제이다.


↑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지앞 비석

조선 중종때 추증한 이름이다. 증,이조참판 남계김공지묘 라 새겨져 있다.


↑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지앞 비석 뒷면


↑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지앞 비석 옆면


↑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지앞 비석 옆면


↑ 남계(南溪) 김맹(金孟)의 묘지 앞 비문


↑ 남계(南溪) 김맹(金孟) 우측에 配 晉州鄭氏의 묘


↑ 우측에서 바라본 남계(南溪) 김맹(金孟)











↑ 묘역 맨 위쪽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 위에서 바라본 우측 모습이다.


↑ 김맹(金孟)의 묘 아래에 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증 손자 도연(道淵) 김치삼(致三)의 묘이다.

그럼 왜 증손자 묘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의 묘 위에 위치했을까? 궁금증이 있을수 밖에 없다.

탁영(濯纓)선생의 묘는 처음부터 이곳에 모신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양주 석교원(1498)에 있다가 목천 작성산에 이장(1506) 그뒤1508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역도로 몰리다 보니 사후에도 편안히 잠들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 김맹(金孟) 묘 아래 있는 묘/도연 김해김공지묘 라 새겨져 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

본관은 김해(金海).자는 계운(季雲),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절효선생 김극일(金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다. 

조선 성종,연산군때의 문신. 주로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하였고,한치의 굽힘이 없었던 문신이다.

연산군 4년 스승 점필재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싣은것이 빌미가 돼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능지처참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돤 인물이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좌측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우측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묘지앞 비석/문민공 탁영 선생의 지묘 라 새겨져 있다.

문민(文愍)이란 임금이 내린 시호다, 시호(諡號)는 왕족 또는 학덕이 높은 사람이 죽은후에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내리는 이름이다.


↑ 비석 뒷면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配 예안김씨의 묘/정부인 예안김씨 지묘라 새겨져 있다.사후 정부인으로 추증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맨 아래 입구 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입구 측면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 묘지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영모재의 가을풍경을 다시한번 카메라에 담았다.


자계서원(紫溪書院)


↑ 자계서원(紫溪書院) 입구

영모재와 절효 선생의 묘역을 둘러보고 영모재를 출발 이서면 운계리에 있는 자계서원(紫溪書院)으로 들어가는 도로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 자계서원(紫溪書院)

자계서원(紫溪書院)앞에 차를 세워놓고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자계서원(紫溪書院)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자계서원(紫溪書院) 대문(大門)


↑ 자계서원(紫溪書院) 대문(大門)의 현판문/유직문 이라 새겨져 있다.


↑ 자계서원(紫溪書院) 대문(大門) 좌측에 자계서원 이란 표지석이 새워져 있다.


↑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대한 안내문이다.

 자계서원(紫溪書院)은 1518년(중종 13)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일손(金馹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자계사(紫溪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6년(선조 9)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5년(광해군 7) 중건하고 김극일(金克一)과 김대유(金大有)를 추가 배향(配享)하였다.1661년(현종 2) ‘자계(紫溪)’라고 사액(賜額)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毁撤)되었으며, 그 뒤 1984년에 복원하였다.




↑ 자계서원(紫溪書院) 전경이다.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갈수가 없어 담 밖에서 담을수 밖에 없었다.


↑ 자계서원(紫溪書院)/좌측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자계서원(紫溪書院)/담밖 좌측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5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전사청(典祀廳), 2층 3칸의 영귀루(詠歸樓), 외삼문(外三門), 비각(碑閣), 4칸의 고자처(庫子處) 등 12동의 건물과 천운담(天雲潭)·탁영대(濯纓臺)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일손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극일과 김대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향사(享祀:제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 탁영(濯纓)선생 순절오백주년추모비/탁영 선생이 심었다는 500년된 은행나무 떨어진 노란잎이 쓸쓸함을 더해주는 듯 하다,


↑ 탁영선생 순절오백주년추모비


↑ 우측에서 바라본 자계서원(紫溪書院)의 모습이다.

영귀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생들이 모여서 시부(詩賦)를 짓기도 하는 곳이며, 비각에는 김극일의 효행을 찬양한 것과 신도비(神道碑)와 원정비(院庭碑) 등이 있다. 영귀루·동재·서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제사 음식)은 4변(籩)4두(豆)이다.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하고 대문밖에서 자계서원(紫溪書院)을 바라보며 사진 몇컥 카메라에 담고 아쉬운 발갈을 돌렸다.  


↑ 운계마을에서 나와 도로 입구에 반대방향에 세워진 자계서원(紫溪書院) 이정표다.

이제 다음 탐방코스인 탁영 종가택이 있는 토평리로 차향해 차량 패달을 밟는다.


탁영(濯纓) 종택(宗宅)

청도 탁영종택(淸道 濯纓宗宅)은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08년 2월 18일 경상북도의 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선조11년(1578) 紫溪祠를 紫溪書院으로 重建하고 紫溪書院에 탁영선생을 奉安하면서 宗宅이 있는 백곡에도 탁영선생 不祧廟를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바 있고 현종2년(1661) 자계원이 賜額되면서 士林에 의한 私不遷位에서 公不遷位로 賜昇되어 선생의

내외분을 봉향하였다. 이후 헌종10년(1844) 昌潤이 노후된 부조묘를 재건하였으며 다시 1940년에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택에는 탁영선생의 문집 등을 보관한 永慕閣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다.

탁영종택은 여러차례 개축하여 건축적으로는 가치가 미흡하나 역사적으로 濯纓 金馹孫의 기상과 내외적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확고한

정신세계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어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있으므로 기념물로 指定한다.


↑ 토평리에 있는 탁영 종택 전경


↑ 탁영 종택 입구에 안내문이 새워져 있다.

↑ 탁영 종택 대문

가을바쁜 철이라 인적도 드물고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담 밖에서 몇컷 할수 밖에 없었다.


↑ 탁영 종택/담 밖에서 안으로 들여다 본 모습이다.


↑ 탁영 종택을 바라 보면서 빼대있는 가문의 전형적인 고택이구나 생각 되었다.


↑ 탁영 종택/담벽과 종택의 모습 


↑ 탁영 종택/멀리서 바라본 담벽과 종택의 모습이다,

다음은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의 묘소를 찿아야 하는데 토평리에 있다는 것만 알고 왔는데...도무지 찿을 길이 없다.

토평리는 김해김씨 삼현파 집성촌으로 누굴 만나면 알고 있으리라 믿으면서 이리저리 헤메다 마을주민을 만날수 있었다.

하지만 묘지는 이 마을이 아닌 토평리 백동마을에 있다고 하면서 길을 알려준다.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의 묘(墓)


↑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의 묘역 전경

길을 알려준 대로 찿아온 마을이 바로 토평리 백동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 벼를 늘고 있는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바로 마을뒷편 동산을 알려준다. 마을에서 묘지까지는 약100m 거리다,

예를 올리고 묘소로 들어섰다.


↑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의 묘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은 절효 김극일 (節孝 金克一) 선생의 손자이며 남계 김맹(南溪 金孟) 선생의 큰아들로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선생의 큰형이다,

1482년(성종 13년)에 알성과 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거쳐 중시(重試)에 장원을 하였을 때 선생은 교리요,

중제 매헌 김기손(梅軒 金驥孫) 선생은 이조좌랑(吏曹佐郎)이며 계제 탁영 김일손(季第 濯纓 金關孫)선생은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

이어서 삼형제가 모두 청선(淸選)의 직에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김해김씨 삼주(三珠)라 하였다.

1486년(성종 17년)의 중시(重誠)급제후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堤學)을 지내니 사림의 중망이 한층 더 높았던 분이다. 


↑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의 묘비/연천군 동창 김공지묘 라 새겨져 있다.

1498년 (연산군 4년) 계제 탁영 선생의 무오사화로 인하여 호남에 유배되었는데 호남 유배지에서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규탄하는

천위사(遷位事)를 조야에 전격 (傳激)하니 삼남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충훈으로 중증반정후 연천군(燕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중종 1년)에 졸하니 향년이 54였다.

1842년 (헌종 8년)에 백동사에 향사하고 1847년(헌종 13년)에 남원 사동서원 (杜洞書院)에 향사하였다.


↑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의 묘비 뒤면


↑ 김준손(金駿孫)의 묘비앞 비석


↑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의 묘비앞 비석

묘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有明朝鮮 通訓大夫 弘文館直提學 知製敎 兼 經筵侍講官 春秋館編修官 金公 墓

유명조선 통훈대부 홍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김공 묘

 라 세겨져 있다

김준손(金駿孫)은 사헌부 집의 김맹(金孟)의 아들이다. 일찍 문행과 덕성이 뛰어나더니 19세에 사마시에 올랐고, 29세에 아우 기손과 함께

진사 갑인과를 거쳐, 33세에 병오 중시에 올라 이름과 성적이 크게 드러나 사람에 추중을 받았다.

정덕 정묘에 세상을 뜨니 시년이 54세라. 수명이 그 덕에 차지 않고 지위가 재목에 맞지 않으니, 조야가 매우 애석히 여겼다.



↑ 김준손(金駿孫)의 묘 뒷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김준손(金駿孫)의 묘역 앞 위선사업헌성록.


↑ 김준손(金駿孫)의 묘역 전경이다.

나의 15대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둘려보고 나의 14대조 삼족당 대유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청도 매전면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에서 약 40여분 거리다. 차창밖엔 조금씩 비를 뿌린다.


유현재(惟賢齋)



↑ 밖에서 바라본 유현재(惟賢齋)

이곳은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제를 지내는 제실이다. 이 역시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몇장 담을수 밖에 없었다.


↑ 유현재(惟賢齋) 대문(大門)

↑ 대문(大門) 현판문에 유현재(惟賢齋) 라 쓰여있다.




 대문(大門) 밖 우측에서 바라본 유현재(惟賢齋) 전경이다


 대문(大門)에서 우측으로 돌아 담 밖에서 바라본 유현재(惟賢齋의 모습이다


 담 밖 뒷편에서 바라본 유현재(惟賢齋의 모습이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묘소가는 길이다.지척에 유현재(惟賢齋)가 보인다

우측 보이는 길로 올라서면 된다.


삼족당(三足堂)의 묘(墓)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묘소로 가는 길이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묘소/밑에서 비라본 모습이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묘소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佑), 호는 삼족당(三足堂)

김대김대유(金大有) 할아버지는 나의 14대 이시다.

직제학 준손(駿孫)의 아들이며, 일손(馹孫)의 조카이다. 정여창의 문인이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일손(馹孫)이 화를 당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조정에서 행실이 올바르고 학문에 뛰어난 자를 구할 때 천거되어 전생서직장을 지내신 분이다.


 삼족당(三足堂) 김선생 지묘

삼족당(三足堂) 선생은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정언, 칠원현감 등을 지냈다.

그해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어 관직과 과거합격을 몰수당하자, 청도의 산 속에 들어가 살았다.

1545년(인종1) 현량과가 복과되어 상경하던 중 병이 나 향리로 되돌아가 죽었다. 청도 자계서원,승주 선암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 濯纓年譜〉가 있다.




↑ 묘비 뒷면 모습이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묘지앞 비석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의 配 숙인 벽진이씨(碧珍李氏)의 묘 비석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의 묘/우측에서 바라본 모습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의 묘/좌측에서 바라본 모습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의 묘(위쪽)와 큰아들 김성(性) 부부의 묘(아래쪽)

나는 대유 할아버지의 14세손이다.

대유 할아버지는의 둘째아들 사시당(四時堂) 김생(生) 할아버지의 묘는 함안군 칠원면 장암리 산96번지에 있으며, 바로 나의 13대조 이시다


삼족대(三足臺)


↑ 삼족대(三足臺)로 오르는 길이다.

유현재((惟賢齋)와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의 묘소를 둘려보고 지척에 있는 삼족대(三足臺)→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에 도착했다


↑ 삼족대(三足臺)/뒷편에서 바라본 모습


↑ 삼족대(三足臺) 측면/삼족대 앞은 강이 흐르고 있어 건물 전면을 담을수는 없다




↑ 삼족대(三足臺)

↑ 삼족대(三足臺)

청도 삼족대(淸道 三足臺)는 김대유(金大有)[1479∼1552]가 관직을 그만두고 우연(愚淵)이 있는 운문산 아래 별장을 지어 살았던 곳이다.

김대유의 본관은 김해이고 제학 김준손의 아들이며,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기도 하다.

김대유의 자호(自號)를 삼족당(三足堂)이라 하였는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벼슬도 현감을 지냈으니

벼슬로도 만족하고, 항상 밥상에 반찬이 부족하지 않으니 먹는 것도 만족하고, 나이도 환갑을 넘겼으니 수명(壽命)도 만족한다 하여

삼족(三足)이라고 이름 지었다.

삼족대는 김대유의 장구지소(杖屨之所)이며, 만년에 생활을 하던 곳으로, 1987년 5월 13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4월 8일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171호로 승격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삼족대(三足臺) 김선생 신도비


↑ 삼족대 김선생 신도비와 삼족대(三足臺)


↑ 삼족대(三足臺)신도비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청도 삼족대(三足臺)안내문이다


↑ 삼족대(三足臺)신도비/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삼족대(三足臺) 아래 팔각정


↑ 팔각정에서 삼족대(三足臺)로 으르는 길이디




↑ 삼족대(三足臺) 탐방을 마치고 나오 강건너 하천가에서 바라본 삼족대(三足臺)의 모습이,정말 그림같은 풍경이 아닐수 없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할아버지는 조선 1479년 제학공 동창 김준손(駿孫)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중정시(中庭試)에 장원을 하시고 현량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춘추관기사관,홍문관의 정언(正言),호조좌랑,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의

벼슬을 지내시고 이곳 삼족대(三足臺)에서 후진양성에 힘쓰시며 풍류를 즐기며 사시다 73세의 나이로 여생을 마치신 분이다.

남부러울게 없는 벼슬도 지내서 족(足)하도, 조석으로 고기밤상이 떨어지지 않아 먹는것도 족(足)하고 나이70을 넘겼으나

그것 또한 족(足)하다 하여 호(號)를 삼족당(三足堂)이라 지었다 한다.


아침 8시에 집을출발, 나의 뿌리를 찿아 나선 하루 일정을 마쳤다. 다소 빠듯한 일정탓에 구석구석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나의 선조님들의 자랑스런 발자취를 출러보면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 값진 탐방 길이었다.

기회가 되면 우리문중 회원들과 함께 꽃피는 봄날 다시한번 선조들의 발자취를 찿아 나서야 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담고

18:30분경 집에도착했다. 

사진/글 산과벗/김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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