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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고인돌 마을

☞옛날·풍속·풍물/한국의 고인돌

by 산과벗 2006. 4. 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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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 톤에 이르는 거대한 덮개 돌의 무게를 떠받친 두 개의 작은 굄돌.
거기에다 20 도나 기울어진 상태로 엄청난 무게의 덮개 돌을 어떻게 지탱할 수 있었을까? 수 천 년 풍상을 고스란히 견뎌낸 그 균형의 미학이 놀라움을 넘어서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무게 50 여 톤의 거대한 덮개 돌을 지상 2.6 미터의 높이의 굄돌로 지탱하는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을 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의문이다.

지석묘, 석붕, 돌멘, 거석

고대 유물 가운데 선사시대 사람들의 무덤인 고인돌처럼 동서양에 두루 퍼져 있는 것도 드물다.
유럽, 남미, 아시아 등 거의 세계 전 지역에 분포하는데, 지역은 대부분 바다와 인접한 곳에 밀집해 있다. 고인돌은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
支石墓라고도 부르며,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서구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으로 부른다.

한반도 고인돌은 대부분 우리 나라에 흔한 화강암 계통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고인돌은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 세 가지 형식이 존재한다. 웅크린 곰의 모양으로 매장 시설의 주요 부분이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남방식 고인돌은 주로 전라도, 경상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또 탁상다리처럼 우뚝 선 모양으로 네 개의 굄돌을 세워서 그 위에 거대한 덮개 돌을 올려놓는 북방식 고인돌은 대동강과 한강 일대에 밀집해 있다. 그러나 개석식 고인돌은 지석을 하지 않은 남방식 고인돌로, 무지석식 고인돌로 불리기도 하며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된다.

한반도는 세계 거석 문화의 중심지

한반도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 밀집 국가로 알려져 있다. 대동강 유역의 1만 여기와 전남 지방의 2만 여기를 합쳐 한반도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는 무려 3만 여기. 전세계 고인돌 5만 여기의 60퍼센트에 해당된다. 그래서 세계 유수의 고고학자들은 한반도가 세계 거석 문화의 중심지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 가운데서도 전북 고창군은 남·북방식 고인돌 1천 여기가 몰려 있는 ‘선사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화순·강화 지역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
세계문화유산 World Cultural Heritage’으로 지정되면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한반도 고인돌은 세계 거석 문화의 발생, 분포 및 전파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밀집 분포도나 규모, 다양한 형식 때문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다.

고인돌 떼무덤이 몰려 있는 고창읍 죽림리

산과 들과 강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면서 토지가 비옥하고, 풍부한 해산물이 생산되는 80킬로미터의 긴 해안선. 이러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고창은 수 천년에 걸쳐 천혜의 문화·관광 자원들이 어루어져 문화 관광의 보고로 꼽히는 곳이다.
고창 읍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남짓한 지점에 자리한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상갑리 일대에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고인돌 떼무덤’이 몰려 있다. 죽림리에서는 고인돌과 함께 조선 초에서 최근까지의 묘지 10여 기도 함께 있어 선사시대와 현대의 묘지 모습을 자연스럽게 비교할 수 있다.

고인돌은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약 1.8 킬로미터 범위 내에 분포되어 있다. 해발 150미터 야산 남쪽 기슭의 밭뙈기나 숲 속에 수 십 기의 크고 작은 고인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그야말로 이 마을의 바윗덩이 거의 모두가 고인돌이라고 보면 된다.
굄돌 없이 땅 위에 덩그마니 앉혀 놓은 것 같은 남방식 고인돌이 대부분인데, 그중 다른 것들의 서너 배는 됨직한 고인돌이 매산마을 밭 가장자리에서 눈에 띈다. 가로 6.5미터, 세로 5.3미터, 높이 약 2미터인 한반도 최대의 남방식 고인돌이다.

이 곳에서는 수 차례의 발굴 결과 447기의 고인돌을 확인했으며, 매몰된 108기를 합하면 555여 기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분실되거나 파괴된 고인돌을 합하면 대략 천 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5개 지점에서 23개 소의 고인돌 상석 채굴지가 발견되었다.
한 마디로 이 일대는 선사시대인의 대규모 공동 묘지인 셈이다. 방사성탄소연대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 지역 고인돌은 지금부터 2,500여년 전인 청동기시대로,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 약 500년 동안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고창읍내에서 서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도산리의 한 민가집 뒷마당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 십 여기가 모여 있다. 그 규모와 독특한 축조 방식이 눈에 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지역이 일찍부터 인류가 생활하기에 적당한 기후 조건과 기름진 토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고인돌만 찾아다녀도 하루해가 짧을 만큼 고창 지역 고인돌의 규모는 넓다.

고창군에서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기념해, 연간 수 십만 명의 세계 관광객이 찾는 영국 스톤헤지나 아일랜드 더블린의 뉴그랜지 거석 문화 유적지처럼 고인돌 공원을 조성, 2001년 10월 ‘세계 고인돌 축제’를 열 계획이다.
현재 이 곳에는 선사시대에 대한 관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하루 평균 3백여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이중 외국인들도 상당수 있어 죽림리 고인돌군은 국제적인 새로운 관광 명소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고창의 또다른 볼거리 동백

야산이나 들판을 지나가다 보면 왠지 시선을 끄는 커다란 바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냥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돌인 것 같은데 왠지 누군가 일부러 갖다놓았을 법한 그런 돌…. 그게 뭘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우리네 조상들이 지금으로부터 3,000 년 전쯤 피땀흘려 옮겨놓은 고인돌이지’. 뭐 그렇게 보면 십중팔구 맞으니까….

이렇듯 고인돌은 우리에게는 흔하디 흔한 것이다. 가히 ‘고인돌 천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반도 전체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4 만기나 된다. 거석무덤이 많다는 아일랜드에 2,400 기, 러시아 코카서스 지역에 2,400 기 정도밖에 안되는데 더 말해 무엇하랴. 너무 흔해 모르고 지나친 고인돌. 그저 어린아이의 놀이터로, 촌로들의 휴식처로 쓰였다. 더러는 칠성바위, 거북바위, 마고(麻姑)할머니로 일컬어지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그런데 연구 결과 32t의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1마일(1.6㎞) 옮기는 데 필요한 인원은 300명에 달했다. 그 옛날에 이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서 고인돌을 만든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터. 고고학자인 이영문 교수(목포대)의 ‘고인돌 이야기’(다지리)는 ‘BC 2000년의 한반도’를 여행하는 길잡이가 된다.

고인돌은 알다시피 청동기시대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정착하여 혈연집단을 이루었고 벼농사를 짓게 되었다. 더 많은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불가피했고 그 과정에서 집단의 안위를 책임지는 우두머리가 필요했다. 다른 집단과의 전쟁을 통해 더 넓은 영역과 노동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고인돌 축조는 단순한 무덤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바로 공동체 사회의 힘을 결집하고 협동단결을 이루기 위한 거족적인 행사였다.  또 간간이 나오는 유골과 청동검, 청동도끼, 다량의 옥(玉)제품 등 부장품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가 된다. 특히 충북 제원 황석리 고인돌에서는 인골 2구가 발견됐는데 각각 키 1m74㎝와 1m45㎝~1m50㎝ 가량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복원 결과 머리는 짱구였고 코가 큰, 서양인의 얼굴에 가까웠다. 이영문 교수는 “고인돌은 무덤이었으며 하나의 성역이었다”면서 “기록으로 남지 않은 선사시대의 역사는 고인돌로 규명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사진과 글 : 김건태 ( 르포 사진작가)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


매산마을에 있는 남한 최대의 바둑판식 고인돌. 가로 6.5cm, 세로 5.3m, 높이 약 2m 되는 상자 모양의 고인돌이다.

국은 고인돌의 나라다. 남북한을 합쳐서 우리나라에 산재한 고인돌의 수는 무려 10만여 기로,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60%에 해당한다고 한다. 97년부터 이 사실이 고고학계에서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며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올리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기도 하다.

런 한반도에서도 전북 고창군은 고인돌 수가 2,000여 기로 고인돌이 가장 밀집된 고장이며,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하갑리 일대 야산 기슭이 고창에서도 으뜸인 고인돌마을이다. 95년 전북발전연구소가 발간한 <고창 고인돌 유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이 일대에는 442기의 고인돌이 산재, 전세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지역임이 확인되었다.

특수 신분의 사람만 썼던 무덤

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이 한자 말의 뜻 그대로, 괴어 놓은 돌무덤이 고인돌이다. 그러나 단순한 무덤과는 조금 다르다. 이를 테면 특수한 신분의 사람만이 썼던 무덤 형식이라는 말이다.

인돌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방사성 탄소연대 등의 조사결과로 미루어 이 지역 고인돌은 대부분 청동기시대인 기원 전 7세기에서 기원 전 2세기 사이 약 500년 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한편, '둥근 통나무를 갱목처럼 놓는 방식 등으로 커다란 돌을 운반할 경우 성인 남자 1명이 감당할 수 있는 돌의 무게를 100kg정도라고 가정하면 20~30톤 되는 바윗돌을 운반하는 데는 적어도 200~300명의 성인 남자가 동원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조사팀은 추정한다.

매년 1기씩 세운 것으로 추정

렇다면 당시 사람의 평균 수명을 50년으로 가정하더라도 500년 간 존재했던 성인 남자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반면 지석묘는 440여 기에 불과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지석묘는 매우 특수한 신분의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던 매장방식이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단,당시 사회의 극소수 지배자만이 아닌 지배계층 모두가 썼던 무덤일 것이라고 고창 고인돌 유적조사팀은 추정한다. 500년간 440기의 고인돌이 세워졌으니 평균 매년 하나 정도씩 생긴 셈인데, 그렇듯 사회의 지배자가 매년 바뀌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배자 주위의 귀족층은 모두가 돌로 된 무덤을 썼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창밖의 바윗덩이는 모두 고인돌


죽림리 매산마을 고인돌 무리. 이 일대는 4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 밀집지다. 고창군이 문화유적관광지로 개발할 예정인 곳이다.

마을에서는 차창 바깥으로 내다뵈는 바윗덩이 거의 모두가 고인돌로 보면 된다. 해발 150m의 야산 남쪽 기슭의 밭뙈기나 소나무 숲 속에 서너 기, 혹은 수십 기의 크고 작은 고인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큰 것은 길이가 3~4m에 높이도 한 길쯤 되는 반면 어떤 것은 길이가 1m쯤에 불과하다.

리고 고인돌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그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바윗덩이로 여겼기 십상이다. 소반(小盤)처럼 지석(支石) 위에 평평한 상석(上石)이 얹힌, 우리가 늘 사진에서 보아오던 북방식 고인돌은 거의 없고 네모난 바윗돌들을 그저 땅 위에 덩그마니 앉혀 놓은 것같은 남방식 고인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남방식과 북방식 혼재한 선사박물관

석을 받치고 있는 지석(支石)은 기껏해야 1m도 채 안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흙에 파묻혀 있다. 그래서 한눈에 지석묘임을 알아 보기 어려운 것이다. 매산부락 송림 둔덕에는 완벽한 형태의 북방식 지석묘가 한 기 놓여 있기도 하다. 고창군내에 북방식 지석묘는 이외에도 고창읍 도산리, 고수면 부곡리 등에 몇 기 더 있다.

렇게 한 지역에 북방식과 남방식 지석묘가 혼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 학자들 말이다. 향토사가인 이기화씨(전 고창문화원 원장)는 "이렇듯 남방식과 북방식이 혼재해 있는 이 지역은 선사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옛적엔 바닷가였던 곳

기화씨는 어릴 적에 이곳 죽림리, 도산리 일대까지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던 풍경을 기억한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고인돌들은 바닷가를 따라 축조되었던 것이다. 요즈음의 풍수와는 다르지만, 이는 죽은 자의 무덤에 바다를 향한 어떤 기원을 담았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인돌은 도로 바로 옆의 논배미뿐 아니라 100여 m 저 위의 둔덕에도 여럿 보인다. 이것은 묻힌 자들의 위계에 따른 배열이었을까. 고인돌들 사이에는 근래의 무덤들도 여러 기 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삼국시대의 고분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를 테면 이곳은 2700여 년간 줄곧 묘지로 사용되었던 셈이다. 고인돌 무리 사이의 조상 무덤 자리에 난 잡초를 뽑던 어느 주민은 마을이 생긴 지는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인구도 많았기에 고인돌도 많은 것


매산마을 뒤 산중턱의 고인돌. 청동기시대 옛 사람들은 상석 아래의 지석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시신과 각종 부장품을 묻었다.

림리 매산마을을 비롯한 고창 지역에 유난스레 많은 고인돌이 밀집한 이유로 학자들은 원석 채취나 축조의 용이함, 이 지역만에 특별히 부여한 신성(神性) 등을 들지만, 유난히 많이 불어났던 인구에 가장 크게 비중을 둔다. 청동기때는 무엇보다 이 지역에 살아온 사람이 많았기에 고인돌도 많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과 그들 수많은 사람을 지배했던 수많은 귀족들--.
그들중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수백 명의 인부들이 동원돼 이 산중 어딘가에서 단단한 청동 연장으로 돌을 잘라낸 다음 이곳 죽림리 야산 기슭까지 며칠간 고생하며 운반했으리라.

산중턱에 채석장 흔적 있어

러한 예상대로 연구팀은 매산마을 뒤 해발180m야산 남서쪽에서 당시 채석장으로 추정되는 곳과 운반도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윗덩이를 발견했다. 고창지역이 대대로 사람이 살기좋은 터였음을 이기화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창은 전남해안 지역에서 동백나무의 상한대랍니다. 그렇게 온난한 데다가 산과 강과 들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고, 토지가 비옥해서 농사가 특히 잘 돼요. 그리고 풍부한 해산물을 의미하는 88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고…. 그러니 옛적부터 사람이 많았을 수밖에요."

2700년 세월에도 요지부동


도산리 지석묘의 야경.

리나라에는 지구상 고인돌의 60%나 있다고 하는데, 그럼 옛날에는 그렇듯 많은 사람이 이 한반도에 밀집해 살았다는 말일까.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우리 문화는 한 마디로 돌의 문화'라는 사실을 발판삼아 해석하려 든다. 즉, 인구가 다른 지역보다 특히 많아서가 아니라 이미 선사(先史)시대부터 돌에 대해 유다른 가치를 부여했기에 그런 많은 지석묘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천년 쓰러지지 않은 비결은?

산마을 동쪽 송림지대 안으로 들어가면 멋장이 고인돌이 한 기 보인다.
상석은 이미 얄팍한 북방식에서 두툼한 남방식으로 바꾼 한편 지석은 높직한 북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부족장의 요절한 젊은 부인이거나 아니면 공주의 무덤일 것이다.

무튼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도 이 멋장이 고인돌을 보면 헛말임이 분명하다.
못되어도 2500년은 넘었을 세월, 강산이 250번도 더 바뀌었을 세월동안에도 이 고인돌은 꼿꼿한 다리가 한 치 어긋남이 없이 견뎌 왔으니 말이다.

고인돌 답사 길잡이

창군내 수많은 고인돌 명소 중 가장 먼저 들러볼 곳은 죽림리 매산마을. 남한 최대의 남방식 지석묘를 비롯, 남북방식이 혼합된 형태를 본다. 고창 읍내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도로를 타고 6km 달리면 아산면 소재지. 여기서 북으로 방향을 틀어 교량을 건너자마자 나오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500m쯤 가면 도로 왼쪽으로 고인돌 밀집지가 시작된다. 다른 길도 있으나, 고인돌마을 방향임을 알려주는 안내 표지판이 아직 제대로 서 있지 않으므로 낯선 외래객은 이 순서로 찾아가는 것이 가장 쉽다.


산마을을 본 다음 차를 돌려 아산면 소재지를 지나 다시 읍내쪽으로 가다가 도산리 지석묘를 들러본다(개념도 참조). 지동마을 정복순할머니네 파란 대문 집 뒤의 장독대로 가면, 우리가 사진에서 늘 보던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를 구경할 수 있다. 이 지석묘는 제단의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인돌 구경은 이 정도로 끝내고 선운산이나 고창읍성(모양성) 구경에 나서는 것이 좋다. 그래도 더 보고 싶다면 고창읍내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남하하다가 고수면 소재지에서 좌회전, 조산저수지쪽으로 가본다. 조산저수지에 이르기 약 300m 전, 도로 오른쪽 약 100m 지점의 논 가운데 지석묘 무리가 있다. 지석묘 구경후 조산 저수지 물빛으로 가슴을 씻은 뒤 선운산으로 향한다.

명  물

선운산복분자주

창 명물인 복분자(覆盆子)술은 장미과에 속하는 산딸기 열매로 만든 술이다. '산중에서 이 열매를 한껏 따먹은 노인이 돌아와 요강에 소변을 보는데 소변 줄기의 힘에 요강이 뒤집혔다'는 전설에서 복분자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 복분자의 효능은 전설 그대로 남성의 정력,그리고 신경쇠약으로 인한 시력 감퇴와 야맹증에 효과가 높다고 한다.

창군이 특산품으로 개발을 유도, 100년 전의 숙성비법으로 제조했다는 이 술은 오로지 복분자를 발효시킨 원액만을 쓴 만큼 향취가 그윽하고 뒷맛도 깨끗하다고 말한다. 군내 100여 농가에서 복분자를 계약 재배한다.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선운산특산주 본사(전화 (063)561-0209)에 가면 비교적 싼 값에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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