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떠난다]차 달이고 향 사르는 곳에 옛길이 통했네 [경향신문 2006-11-09] 수행자나 차꾼들은 차를 음식 먹듯 마셨다. 그래서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나왔다. 불가에서는 차를 마음의 안락을 체험하는 수행의 방편으로 마셨다. 그렇다고 차가 불가(佛家)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유가에서는 차를 군자와 같이 여겼고, 조선조 조정에서는 일하기 전에 차 마시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를 다시(茶時)라 하였다.
◇경남 양산 통도사 가볼 만한 찻집은 통도사 일주문 왼편에 있는데, 그곳 ‘선다원’에 앉아 차향을 맡고 있으면 귀로는 솔바람 소리가 들린다.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스님은 그 소리를 송도활성(松濤活聲)이라 했다. 파도처럼 살아 있는 솔바람 소리라는 뜻이리라. 차 한 잔을 마시며 맑은 차로 눈을 씻고, 솔바람 소리로 귀를 씻으니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터. 선다원에서 청나라 때의 찻잔에 보이차를 몇 잔 마시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나던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저잣거리의 힘든 삶이 한 순간에 녹으며 또 다른 경계가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경봉스님은 ‘차 달이고 향 사르는 곳에 옛 길이 통했네’라고 노래한 바 있는데, 옛 길이란 모든 수행자들이 이르고자 했던 ‘자유의 길’, 즉 해탈의 길이 아니었을까. 찻집에 앉아 잠깐 동안이나마 스님의 게송 한 구절을 화두로 삼아보면 어떨까 싶다.
다솔사는 작은 절이어서 아름답다. 절 이름도 정겹고, 법당 뒤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차밭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차밭에 그늘을 던지는 황금빛 편백나무 숲도 눈을 부시게 한다. 경내의 찻집에 들르면 그림자마저 한가해진다. 아기자기한 찻잔이나 다탁(茶卓)들도 눈길을 붙든다. 찻집에 앉아 효당의 한 마디를 다시 새기는 것도 정복(淨福)이다.
“아침에 방문 열고 (설경을) 내다보며 한 사람이 부지중에 말한다. ‘아이 눈 봐! 깨끗도 하네.’ 이 말이 진언(眞言)이다. 누구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자연에게 천지를 향해 불쑥 느낀 바 감동을 그대로 읊어서 한 말이기에 진언이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참말인지 아닌지를 가르쳐주는 효당의 법문이다. 얼마나 많은 말의 홍수와 군더더기 속에서 살아 왔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차 한 잔 마실 때의 침묵이 소중한 것이리라.
“중국차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펴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하겠다.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했다. 진(眞)을 지키고 속(俗)을 거스르는 것이 모두 이러했다.” 쌍계사 입구에 아주 오래된 묵은 찻집인 녹향다원이 있는데, 그곳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참됨을 지키고 속됨을 거스르는 인연을 짓는 일도 좋을 듯하다. 어느 해 늦가을이었던가. 작고한 정채봉형과 녹향다원에서 나와 그곳을 막 떠나려고 할 때의 풍경이 문득 떠오른다. 어디선가 되새떼가 날아와 달무리 같은 모양으로 서녘하늘을 점점이 가득 덮었던 순간이었다. 지금도 형은 그 풍경을 그리워할지 모르겠다. ◇전남 강진 백련사
◇전남 해남 대흥사 일지암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입적 때까지 은둔했던 다사이다. 암자 앞 산자락에 차밭이 있지만 세월이 더 흘러야 풍광이 생길 것 같다. 암자의 특산물은 뭐니뭐니해도 유천(乳泉)에서 나는 샘물 맛이다. 초의선사는 물을 차의 몸(體)이라고 했다. 그만큼 물은 차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일지암 물맛의 비결은 두륜산 속에 묻힌 맥반석이라고 한다. 여연스님이 만든 반야차도 일지암을 찾는 차꾼들에게 인기가 있다. 일지암 누각에서 두륜산 자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풍류는 세상의 그 무엇도 부럽지 않게 한다. 더불어 누군가가 초의선사의 ‘동다송’ 중에서 가장 빼어난 구절을 읊조린다면 선경(禪境)이 따로 없을 터. ‘찻물 끓는 대숲 소리 솔바람소리 쓸쓸하고 청량하니/ 맑고 찬 기운 뼈에 스며 마음을 깨워주네/ 흰 구름 밝은 달 청해 두 손님 되니/ 도인의 찻자리 이것이 빼어난 경지라네.’ 암주가 없어 일지암에서 찻자리를 갖지 못했다면 대흥사 경내의 찻집에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만 가지 천 가지의 말도 차 한 잔 마시는 것 밖에 있지 않다(萬語與千言 不外喫茶去)고 했던가. 어디서 마신들 고요히 마시는 차 한 잔의 의미가 어찌 퇴색하겠는가. 전남 화순 쌍봉사 앞에 암자를 짓고 사는 소설가 정찬주씨는 사찰과 인연이 깊다. 저서 ‘암자로 가는 길’로 암자기행의 전범을 보여준 그는 최근 역사 속 다인(茶人) 50명의 이야기를 모아 ‘다인기행’(열림원)을 펴냈다. 〈茶弟 정찬주|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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