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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2일차/울산바위(설악산 미시령에서'07.8.6)

☞나의 포토갤러리/나의 旅行記

by 산과벗 2007. 8. 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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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바위/미시령에서('07.8.6)

 (위  사진은 가져온 사진)

 

외설악 신흥사 앞에서 서북계곡으로 따라 올라가 내원암을 지나 산마루에 올라서면 엄청난 바위산이 가로막고 있다. 이 산이 바로 울산 바위이다.

 
첫 번째 울산바위 전설은?

 조물주가 강원도 땅에 천하의 이름난 산 하나를 만들되 산봉우리의 수를 꼭 1만2천으로 할 계획을 세우고 각 지방의 산봉 중에서 웅대하기로나 남의 눈을 끌만한 산에게 명령을 내려 모월 모일 모시를 기한으로 금강산 쪽으로 오면 심사하여 합격한 산에 대하여는 용모에 알맞은 자리를 내어 주겠다고 했다. 이에 전국 각처의 수많은 산들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모두 모여들었다. 
이때 경상도 울산(蔚山) 땅에 둘레가 10리나 되며 웅장한 바위인 ‘울산바위’도 금강산으로 떠나왔다. 그러나 태백산령을 걸어오는데 워낙 몸집이 육중해 빨리 걸을 수 없어 온힘을 다해 걸었으나 설악산 지금의 울산바위 있는 근처까지 와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쉰 뒤에 다음날 다시 육중한 몸을 끌며, 금강산에 가서 조물주를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울산바위가 금강산 어귀에 들어섰으나 이미 1만2천봉이 다 정해졌기 때문에 자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 주위의 웃음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한 바위는 어젯밤 쉬던 곳을 생각했다. 어차피 금강산에서 단역을 하느니, 외설악에서 주역 노릇을 하자는 생각으로 울산바위는 현재 외설악 중턱에 자리잡았다. 

두번째 울산바위 전설은?

첫번째 전설과는 달리 울산(鬱山)바위의 울(鬱)은 울타리를 뜻하는 말로 울산(蔚山)의 울(蔚)자와는 완전히 글자가 다르다. 다만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울산에서 왔기에 울산바위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울산바위는 울타리처럼 생겼다는 의미에서 울산바위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현실성 있다.

또다른 울산바위 전설

세 번째는 동자승의 재치가 빛나는 울산바위 전설이다. 울산바위가 울산에서 왔다는 전설을 들은 조선왕조 때 한  울산부사가 설악산에 탐승을 왔다가 이곳에서 울산바위의 전설을 듣고 승려들을 골탕먹여 치부(致富)해 볼 꾀를 냈다. 부사는 신흥사에 들러 주지를 불러 ‘너는 어찌하여 내 고을에 있던 울산바위가 너의 사찰에 와 있는데도 지세(地稅)를 이제까지 물지 않느냐? 몇 해를 기다려도 지세를 가지고 오는 낌새가 없기에 오늘은 직접 지세를 받으러 왔다’고 호통을 쳤다. 
이에 유생들 횡포에 기가 죽어 있던 신흥사 주지는 그해부터 울산부사에게 울산바위의 지세를 물기로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말았다. 그해부터 막대한 지세를 물다보니 신흥사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 주지승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승의 근심을 곁에서 지켜본 동자승이 ‘앞으로 울산에서 울산바위 지세를 받으러 오거든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라고 자신했다. 얼마 뒤 울산에서 사람이 오자 동자승은 ‘지금까지 억울한 지세를 물어왔으나 이미 문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금년부터는 물어줄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동자승은 ‘울산바위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지 않아 우리에게는 큰 손해일 뿐이니 울산바위를 도로 울산으로 옮겨가든지 하라’고 말했다. 울산에서 온 사람도 도리가 궁해 ‘네 말대로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옮겨가겠는데, 타고남은 재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묶어주면 바위를 옮기겠다’고 요구했다.

이에 동자승은 마을사람들과 절간 승려들을 동원해 며칠동안 새끼를 꼬게 해 울산바위를 칭칭 감았다. 그리고 광솔에 불을 붙여 새끼를 다 태워버리니 울산바위는 재로 된 새끼로 얽혀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울산사람에게 약속대로 했으니 바위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자 울산사람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2007. 8.6 

미시령을 넘어가면서 담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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