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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表具)의 역사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7. 8. 3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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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表具)의 역사

 

고대 표구의 발생은 작품 보존의 필요성과 장식의 요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찢어지거나 훼손된 작품을 보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작품의 뒷면에 다른 종이를 오려서 보수하는 정도의 극히 초보적인 행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작품보존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기술의 진전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배접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배접의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작품을 보다 장식적으로 치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표장물도 이러한 욕구가 몇몇 창의력 있는 장배가들에 의하여 창제되었을 것이다.

 

표장물 중에서도 병풍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시기는 중국의 한대로 보고 있다.

 

족자는 북송때부터 벽에 걸어서 감상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족자 표구는 원래 티베트의 초기 불교 사원에서 야외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불화를 꾸민 것이 그 효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족자의 형식이 중국에서 유입되었던 것은 불교전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그것은 고대 중국의 표구물 중 대부분이 경권과 불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표구 기술은 어느 시대에 어떠한 경로로 유입되었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고구려는 건국초기에 '유기'라는 역사서를 만들었고, 이불란사와 성문사를 세워 국가의 초석을 다졌던, 서기 375년까지는 중국으로 부터 장배 내지는 기술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집작해 볼 수 있다.

 

즉 소수림왕 2년 (AD.372년)에 중국의 대왕 부견이 스님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등여와 불교의 전래가 본격화 되었으며, 이때 가져온 경문은 장배내지는 표장된 일종의 표구물인 경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해서 장배술 내지는 표장술이 유입되었다고 보여진다.

 

이같은 사실은 근년 북한에서 발굴 조사된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 소재의 고분벽화를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고분은 영락 18년 (AD.407년)이라는 기년이 있으며, 고분의 주인공인 유주자사가 앉아 있는 좌상의 주위에 병풍을 둘러치고 있는 벽화가 있어 주목된다.

 

물론 벽화에 보이는 병풍이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것인지, 중국의 수입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당시 귀족 사회에서 공식적인 행사에 장업용과 의례용으로 병풍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임은 분명하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 병풍이 사용되었던 시기는 서기 407년 이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보다 32년이 앞선 서기 375년 경에는 이미 표구기술의 유입이 어느정도 실현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같은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덕흥리 고분보다 연대가 앞선 영화 13년(서기357년)의 묵서명이 있는 안악 3호분을 들 수 있다.

 

이 무덤의 벽화에서도 주인공이 앉아있는 좌상의 주위에 매우 야트막한 병풍이 둘러쳐져 있다. 유주지사의 병풍이나 안악 3호분의 병풍이 놓여진 위치, 크기, 모양은 물론 주인공의 복장과 자세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유사한데, 이로보면 당시에 이러한 병풍 형식이 많이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안악 3호분의 묘주 및 묘주 부인이 앉아있는 보개의 네 귀퉁이와 꼭대기는 봉오리진 연꽃과 반개된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이미 불교적 요소가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서기 372년 보다 15년 전인 안악 3호분의 축조시에 이미 불교가 귀족 계급 속에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시기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는 표구의 전래와도 관련지어 볼 수 있어서 375년 경에는 표구 기술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玄川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 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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