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중국 서예가 구양순 (歐陽詢 557∼641) 은 누구인가?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7. 8. 31. 16:44

본문

 
 

 구양순 (歐陽詢 557∼641) 은 누구인가?


 중국 당나라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 담주(潭州) 임상(臨湘;湖南省) 출생. 수(隋)의 양제(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예식을 관장하는 벼슬)가 되었고, 당의 고조(高祖)가 즉위하자 급사중(給事中,황제의 측근에서 일하는 관직)으로 발탁되었다. 624년 칙령을 받들어 《예문유취(藝文類聚)》 100권을 수찬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황태자보자관)이 되었고, 홍문관(弘文館) 학사(교수)를 겸했으며, 발해남(渤海男)으로 봉함을 받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를 수여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서(書)에 능하여 이름이 우리나라까지 알려졌다. 비백(飛白)·전(篆)·예(隸)·해(楷)·행(行)·장초(章草)·초(草)의 서체를 자유로이 썼으나, 그 중에도 해서(楷書)가 가장 뛰어났다. 서풍(書風)은 왕희지(王羲之) 이래의 정통파 흐름을 받은 데다 새 시대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전형미를 창작하여 후세에 해법(楷法)의 모범이 되었다. 우세남(虞世南)·저수량과 함께 초당(初唐)의 삼대가(三大家)로 추앙되고 있다. 현존하는 서적(書跡) 중에서 <구성궁예천명(九成官醴泉銘)>이 가장 유명하다.



 구양순의 글씨의 특징


 구양순은 특히 해서에 뛰어났다. 젊어서 이왕(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헌지)의 글씨를 공부하여 그의 결체는 강건하고 세차면서 잘 정돈된 편이었다. 중기에 한나라 예서와 삭정의 장초를 익힌 뒤 그 영향을 받아 근엄한 결구를 갖추게 되면서 골력은 억세나 운치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다시 난정서 등 왕희지의 명적을 임서하면서 험경하기만 하였던 분위기에서 방원을 겸용하여 험경한 필세속에 조용한 맛이 감돌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감도는 그의 독특한 서풍을 만들었다.

 그의 글씨에서는 힘의 균형이 잘 어울려 보이는데 대담하게 공간을 비우거나 극도로 좁히는가 하면, 굽거나 반듯한 곳이 적당하게 어울리게 배치되어 있어 변화가 풍부하면서 안정되어 있다. 그의 결체는 왕희지의 기법에 한예의 요소를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자기서풍을 만들었다. 따라서 중국의 서예사에 우뚝한 규범을 제시하였고 우리나라에 까지 영향력을 끼쳤기에 오늘날 글씨의 성인(書聖)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구양순의 대표적인 작품


해서 ; <황보탄비>~구양순이 70세 이후 정관년간에 새긴비로 섬서성 서안에 있다.

       <방언겸 비>~75세 때 새긴 비로 산동성에 있다

       <화도사 옹선사비>~75세 때 새긴 비

       <구성궁 예천명>~76세 때 새긴 비로 섬서성에 있다.

       <온언박비>~81세 때 새긴 비로 섬서성 예천에 있다.

       <반야파라밀다 심경(반야바라밀다심경)>~ 백록사에서 쓴 것으로

                     요주에서 새겼으나 원석은 없어지고 복각본이 있다.

       <소해 천자문>~85세 때 쓴 것으로 송의 보각 유편에 수록되어 있다.


행서 ; <복상첩>~6행 50자로 남아있다

       <장한첩>~11행 98자로 백마지본으로 삼희당 법첩에 있다.

       <몽전첩>~9행 78자.

       <행서 천자문>~70세가 넘어서 쓴 것으로 104행이다. 선화서보에 실려있다.

       <정무본 난정서>~왕희지의 난정서를 임서한 것으로 각본이 200여종  되며

        그 중에서 조맹부의 소장본을 제일로 친다.


초서 ; <초서 천자문>~ 이는 대부분 결락되어 불완전하다.

                       선화서보에 실려있는 효경, 영허, 경조 등이 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