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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일---민속해설 방법론

☞나의 포토갤러리/창원 박물대학

by 산과벗 2009. 10. 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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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일(목)

 

◯ 주제 : 민속해설 방법론

◯ 강사 : 정상박 문학박사/동아대 명예교수

 

▶ 관혼상제(冠婚喪祭)

관혼상제 국민이 지켜야 하는 법은 헌법이고 사람이 지켜야 하는 것이 예법입니다 예법은 관례, 혼례, 장례, 제례의 네 가지로 크게 나뉘는데, 이것을 줄여 관혼상제(冠婚喪祭)라고 합니다 관례 (冠禮) 여자의 경우는 계례라고 합니다....

 

▶ 세시풍속(민속)[歲時風俗]

세시(歲時)·세사(歲事)·월령(月令)·시령(時令) 등으로도 불리고 근래에는 연중행사라는 말도 쓴다. 세시풍속은 태음력(太陰曆)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특히 달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원래 음력은 태양태음력을 말한다. 이를테면 순전한 음력이 아니라 계절과 역일(曆日)의 조화를 고려하여 태음력을 가미한 태음력과 태양력의 혼합이다. 따라서 세시풍속은 음력과 양력이 혼합된 태음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한 해를 기준으로 달마다 배분되어 있는 것이다. 달의 주기성과 변화되는 생산성은 한국의 세시풍속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매 절기마다 상이한 풍습을 만들었다.

 

▶ 두루마기 (복식)

북방계 민족이 방한(防寒)을 위해 상고시대부터 입던 옷에서 비롯되었으며, 〈삼국지〉 부여전의 기록으로 보아 부족국가시대부터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 의하면 두루마기의 형태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소매가 넓고 길며 여밈이 직령교임식(直領交袵式 : 깃은 곧고 섶은 겹치도록 옷을 여미는 방식)인 것과 소매가 좁고 길이가 짧은 것이다.

삼국시대의 두루마기는 〈백제국사도〉·〈삼국사신도〉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삼국시대의 두루마기 형태는 비슷하다. 상하에 모두 두루마기를 착용한 데에는 방한 이외에도 의례가 더 크게 작용한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백저포(白苧布)로 이어져 착용되었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철릭·창의(氅衣)·도포(道袍)·중치막·학창의(鶴氅衣)·심의(深衣)·답호(褡)처럼 다양하게 발전했다. 조선시대 초기의 두루마기는 목판깃·칼깃·옷길이가 종아리에 오고 소매도 좁고 품이 상당히 넓은 두루 막힌 옷이었는데 둥그레깃이 되고 무와 옷고름이 첨가되어 오늘날과 같은 두루마기로 정착되었다. 여름에는 모시홑단두루마기, 봄과 가을에는 목면두루마기, 겨울에는 솜을 두어 만든 솜두루마기와 누비두루마기를 흔히 입었다. 두루마기는 매우 널리 입혀졌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하층민까지 보편화되었다. 그후 고종(高宗)대에 도포가 비활동적이라는 이유로 좀더 단순화된 두루마기가 평상시의 예복이 되었다. 개화기에 착용하기 시작한 두루마기는 이미 복제에 대한 신분상의 구분이 없어졌다.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는 전라도 지방에 전하는 민속놀이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8호이다. 주로 해남·무안·진도·완도 등지에서 음력 8월 15일 밤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는 놀이이다. 한자어 ‘强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강강'의 강은 '주위·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사투리이며, 술래는 한자어 '순라(巡羅)'에서 비롯된 말로서 경계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주위를 경계하라’는 구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유래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수병을 거느리고 해남의 우수영에서 왜군과 대치할 때의 일화가 전한다. 조선 측 수병들이 매우 많은 것처럼 보여 왜군이 함부로 침입해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부녀자들로 하여금 남자 차림을 하고 떼지어 올라가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게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바다 위의 왜군들은 이순신의 군사가 엄청나게 많은 줄로 알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한다. 싸움이 끝난 뒤 부근의 마을 부녀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며 즐기던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강강술래라 한다.

 

영산 쇠머리대기 [靈山-]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

목우전(木牛戰)·나무쇠싸움·나무소싸움이라고도 한다.

속설에 따르면 영산읍을 가운데 두고 마주서 있는 영취산(靈鷲山)과 함박산의 모양은 두 마리의 소가 마주 겨누고 있는 형상으로 둘 사이에 산살(山煞)이 끼어 있다고 하여, 산살을 풀어주기 위하여 이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해마다 음력 정월 초순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대보름에 절정에 이른다. 거주지를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로 편을 나누고, 동쪽을 양(陽)이라 하여 남성을, 서쪽을 음(陰)이라 하여 여성을 상징하고,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나무소[木牛]의 구조는 머리와 몸으로 구분되는데 머리 부분은 삼각형이고 몸 부분은 직사각형이며, 소나무 장목 20여 개를 가로세로로 엇갈려 새끼줄로 동여매고 그것을 멜꾼들이 떠멘다. 두꺼운 마분지 등으로 쇠머리를 만들고 눈 ·코 ·입 등을 그린 다음, 이것을 받침목 위에 매단다. 머리 둘레에는 색종이를 늘어뜨리고 나무소가 완성되면 부정타지 않도록 밤낮으로 지킨다.

싸움을 하기 위해 양편이 진군을 할 때에는 동부 ·서부를 표시하는 깃발을 선두에 세우고 뒤이어 총사령부 ·대장기 ·중장기 ·소장기 ·동방청제장군기 등이 들어선다. 본놀이인 나무쇠싸움에 앞서 진잡이놀이를 한다. 진잡이란 양측의 장군들(모두 6명)이 말을 타고 달려서 상대편의 진을 돌파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서로 상대편의 돌파를 방해하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는 수가 많다. 진잡이놀이가 끝나면 저녁 무렵에 본놀이가 시작된다. 나무소 위에서 장군이 칼을 휘두르며 지휘를 하고 수많은 장정들이 나무소를 메고 진군을 한다. 농악대의 소리가 울리고 나무소는 서로 접근하여 소의 머리를 서로 맞대고 밀어 승부를 가리는데, 뒤로 밀리거나 밑으로 깔리면 승부가 판가름난다.

 

9월10(목) : 불참

 

◯ 주제 : 한국 전통조경의 이해

◯ 강사 : 정재훈 교수/한국문화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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