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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은해사/거조암/임고서원 답사여행기

☞나의 포토갤러리/나의 旅行記

by 산과벗 2009. 12. 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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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 은해사/거조암/임고서원 답사여행기

(2009.12.11)

 

오늘은 창원박물대학 마지막 졸업 답사여행이다.

박물대 입학식이 엇그제 같은데...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더니 세월한번 빠르다는걸 새삼 느끼며 집을 나선다.

마지막 답사라 그런지 많은 동기생들이 함께한듯..버스 3대에 편승,창원을 출발한다. 

 

 

▲ 영천문화원 

차창밖의 풍경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짙은 안개를 가르며 고속도로를 질주한 차량은 영천에 도착,

시내 좁은 도로를 두어바뀌 돌며 영천문화원에 도착했다.

깔끔하고 제법 그럴싸한 문화원 건물을 바라보면서 아직 셋방살이를 면치못하고 있는 우리 창원문화원의 초라한 모습을 떠오리며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다..하지만 신축하고 있는 창원문화원이 내년에 입주가 가능하다고 하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 영천문화원 앞 산남의진비 (山南義陣碑)

 영천 문화원 앞에 있는 산남의진비(山南義陣碑)다. 구한말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산남의진을 일으켰던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양세 의병장의 공훈을 추모하고 후세에 그 분들의 구국충절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다.

 ▲ 조양각(朝陽閣)/영천문화원 옆  

영천 문화원 옆 금호강 벼랑 위에 자리잡은 조양각은 일명 명원루 또는 서세루라고 불린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세운 것이며,그 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버리고, 지금의 건물은

인조 16년(1638)에 다시 세운 것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누각 안에는 포은 정몽주의「청계석벽」등 시 70여 점이 걸려있다.

 ▲ 조양각 설명문

건물 앞에는 조양각에 대한 상세한 설명문이 세워져 있었다.  

 

 ▲ 황성옛터 기념비

조양각 왼편에 '황성옛터'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앞면 아래 내용을 살펴보면  

1908년 영천시 성내동 13번지에서 출생

1941. 평안북도 강계에서 연국 공연도중 타계

주요작품

● 황성옛터, 대한팔경 작사 조선행진곡, 항구의 일야 작사 작곡

● 5만원의 재보, 경성야화, 도적과 황금, 홍길동전 극본

●  돌아온 아버지, 나그네, 남매 연극주연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혼을 심은 우리들의 노래 황성옛터...

 그 노래를 지은 왕평 이응호님을 기려 여기 억겁으로 살아 숨쉴 생명의 돌을 세우노라. 

님은 어둡고 처절했던 일제 후반기에 작사 작곡을 하면서 연극 영화를 했고 극본을 쓰면서

민족정기를 일깨운 영천이 낳은 천재요 시들지 않는 예술인이다.

비록 34세로 요절한 비운의 일생이지만 님이 남긴 자취는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에 푸른 빛으로 남으리라.

 

 

     ↑ 황성옛터 기념비

  

   ↑황성옛터 앞에서

 

 ▲ 황성옛터 기념비 앞에서

황성옛터 기념비 앞에서 모두들 사진찍기가 바쁘다...

비를 배경으로 이몸도 한컷하고 싶었지만 기다려야하는 번거러움 때문에 동기생들의 모습만 카메라에 담고 발길을 돌렸다.

 

 ▲ 조양각(朝陽閣)

다시 바라본 조양각..영천지방 문화의 상징으로 영남 7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건물이라 한다.

 

 

      ↑ 영천 문화언장의 인사말

  

 

   조양각 앞에서 단체 기념촬영

 

   ▲ 영천문화원장의 인사말

영천 문화원장의 인사말...영천을 찾아준 우리일행을 환영한다는 말과함께 영천지방의 문화재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고 있다.

이어 중후한 멋을 풍기는 조양각을 배경으로 동기생 단체 기념촬영을 가졌다.

   

 ▲ 조양각앞 하천풍경

 조양각 답사를 끝내고 버스를 타기위해 발길을 돌리다 바라본 금호강...갈대와 푸른물이 어을린 운치있는 풍경이였다.

 

 ▲ 달리는 버스안에서 바라본 풍경

영천문화원을 뒤로하고 은해사로 달리는 버스안에서 바라본 풍경...

안개를 걷어내는 먹구름 사이로 파란하늘이 얼굴을 내미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게 다가와 카메라에 담았다.

 

   ▲ 은해사 일주문

 약 20여분 달렸을까? 팔공산 은해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다. 

 

 

↑ 안동식당

안동식당에서 식사

 

▲ 점심식사 풍경

시간이 12시넘었다...일주문 앞에있는 기 예약한 안동식당에 모두 들려

산나물 비빔밥에 소주,맥주도 한잔씩 곁들이며  맛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동기생들이다.

 

 ▲ 일주문1

 은해사 일주문은 타 사찰보다 규모도 클뿐아니라 단청 등 그 화려함이 우리일행을 발길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 일주문2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오색찬란한 화려한 단청이였다.

 

 

 ↑ 팔공산 은해사 일주문

↑ 일주문 단청

 

 

 ↑ 일주문 단청1

일주문 단청2

 

  ▲ 일주문의 단청

 일필휘지로 갈긴 팔공산 은해사란 현판...천정위쪽 여의주를 물고있는 두마리의 용...뽀족하면서도 고풍스런 미를 간직한

한국특유의 건축미..모두다 예술 그 자체로 다가왔다.

 

▲ 솔밭길

  은해사로 들어가는 솔밭길이다.

 

 

 ↑ 가이드의 설명

↑ 은해사로 들어서는 일행들

 

  ▲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은해사로 들어가기전...영천 문화원에서 알선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이다.

우측 사진은 김성찬 회장이 동창회 깃발을 높이들고 당당한 모습으로 은해사로 향해 들어서고 있는 자랑스런 동기생들이다.

 

  ▲ 빛바랜 단풍의 운치

솔밭길 사이사이에는 빛바랜 단풍이 가지와 맺은 정때문인지..잎을 매달고 있는 모습이 늦가을의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 사랑나무

사랑나무 설명

 

▲ 사랑나무의 전설

10연녀생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서로 합친 사랑나무...다른 수종의 나무가 겹처져 오랜세월이 지나 합쳐진 연리목이다...  

충성,효성,애정 등을 상징하는 연리지..옛선조들도 이같은 현상을 귀이하고 경사스런 일로 여겨왔다..

나무 왼쪽으로 돌면 아들을,오른쪽으로 돌면 딸을 낳고,사이가 안좋은 부부가 함께손을잡고 돌면 화합한다는 구전이 있다고 한다.

 

▲ 부도 앞에서

가이드는 부도가 즐지어 서 있는 담장안으로 들어가 상세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특히, 권씨 마마비

전직 상궁의 비인데 궁에서는 죽어서 나오지 못하고 궁에서 나오면 일종의 퇴직름을 받아

사찰에 시주하고 몸을 의탁하다가 죽어 만든 것이라나....

또한 부도 하나하나는 요즘 계모인 같은 조직을 만들어 은해사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말도 전한다.

 

  ▲ 부도 담장

부도를 둘려싸고 있는 담장이다..모처럼 만난 기와 담장이라 운치도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도 몇컷 찍고 발길을 돌린다.

 

 

↑ 은해사 위치도

↑ 은해사 안내문

 

 ▲ 은해사 안내문

부도 바로위쪽에 자리한 은해사 위치와 은해사에 대한 설명문이 적혀있는 현판이다.

팔공산 은해사(銀海寺)는 경북 영천군 청통면 신월리에 조재한 은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재10교구 본산으로,

신라 제41대 헌덕왕 초년(809)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절로서 처음에는 안사라고 불렀다.

그 뒤 고려 제24대 원종왕 11년(1270ㅁ)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다시 조선 제13대 명종1년(1546)에 천교(天敎)의 자리가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기면서 법당을 새로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고 인종(조선 제12대 왕)의 태실을 봉안하고 절이름도 은해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절은 오랜 세월 거듭되는 여러번의 실화로 사지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모두 다 타 버려서

큰 절인데도 불구하고 문화재가 편이다.

 

 ▲ 보화루앞 다리

 은해사 안내 현판에서 우로 돌아서지 맑은 계류를 가로 지르는 다리를 지나고 있다.

 

 ▲ 보화루

 보화루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이다. 모두 3개조로 나뉘어 이동하면서 설명을 들으며 사찰을 둘려보았다.

 

 ▲ 범종루각

 보화루에 들어서자 왼쪽으로 범종루각이 멋진모습을 하고 서 있었다.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은해사의 범종루각 또한 고풍스런 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 범종설명

우리 가이드...범종에 대한 설명을 하고있는 모습이다.

우리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솔선해서 우리일행을 안내하며 열띤 설명을 하고있는 가이드님께 박수 갈채를 보낸다...

 

 ▲ 인기만점의 안내원

열띤 설명 덕인가? 인기만점인 우리 가이드님! 여성 동기생들 너도나도 할것없이 안내자와 함께 기념사진 찍기가 바쁘다...

안내도 힘든데...모델까지...그래도 마냥 즐거운듯 입가엔 미소가 번지는구나...

 

 ▲ 범종루각의 모습

범종루의 멋진모습....범종에 대한 설명을 듣고 삼삼오오 사진찍기가 바쁜 일행들이다.

 

 ▲ 은해사 강당/대웅전 앞

 이 건물은 은해사 대웅전 앞 마당 왼쪽에 있는 건물...자세히 살피지못해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강당인듯 했다.

 

 

 ↑ 은해사 향나무 앞에서

↑ 은해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 범종루

↑ 은해사 강당

 

▲ 은해사의 풍경

  대웅전 앞 향나무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스님의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이다.

 

 ▲ 은해사 극락보전 

은해사 대웅전은 수리중에 있었다...이 사진은 사진을 보고 찍은 대웅전의 모습이다.  

 지금의 은해사는 1906년 당시의 김기철 군수가 자금을 모으고 석담 스님과 대중 스님이 시주를 모아

부속건물을 많이 넣고 대중수하였다.

 

▲ 은해사 성보박물관

은해사 성보박물관의 모습이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문화재의 도난방지와 보존을 위해 1996년 12월23일 착공하여 2003년 4월 19일에 준공하였고,

2005년 5월에 개관하였다. 성보박물관은 건평 140여평의 전면 9칸, 측면 5칸의 전통목조건축 형식에 실내전시공간을 비롯하여

학예실, 수장고등이 마련되어 있다.은해사는 천년의 역사와 수많은, 수만의 고승,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유익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대 사찰이다.

 

 ↑ 성보박물관을 배경으로

↑ 송림을 배경으로

 

 

↑ 쌍거북 바위

쌍거북 바위 안내문

 

▲ 은해사의 이모저모

우리 일행들은 은해사를 둘려보고 삼삼오오 기념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쌍거북 바위다. 조그마한 연못가에 엎드린 거북바위...옆에는 쌍 거북바위에 대한 설명문이 서 있었다.

  

▲ 거북바위 앞에서

거북바위 앞 작은 연못 한가운데 홈이패인 연꽃모양을 한 조각품이 하나 떠 있었는데..

우리 원장님 그곳에 동전을 던져 집어넣고 있는 모습이다.다.. 성공하자 모두들 박장대소 하며 즐겁운 표정들이였다. 

   

 ▲ 원장님과 기념촬영

쌍거북바위 앞에서  송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장 남겼다. 원장님과 함께한 유일한 사진으로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 송림길

은해서사를 뒤로하고 일주문을 향해 내려오는 길목에서 만난 송림길이다. 

 

▲ 은해사 앞 계곡

계곡 이름은 모르겠지만 송림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류...여름 철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듯한 풍경이엿다.

  

▲ 해맑은 두 여인/은해사를 출발하기전

짙은 썬글라스의 한연숙,정명둘 동기생!..해 맑은 미소가 오늘따라 너무 아릅답도다...은해서 답사를 마치고 버스에 탑승하기직전..

 

▲ 거조암 영산정

우리 일행은 은해사 답사를 마치고 거조암으로 이동했다..

거조안 영산전은 국보제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조사는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 영산정에 대한 설명

거조암 영산정에 대한 설명문이다.

  

 

 ↑ 거조암 3층석탑

거조암 3층석탑 안내문

 

 

  ↑ 영산루각의 모습

 ↑ 영산루

 

▲ 거조암 삼층석탑과 영산루

거조암은 국보 영산전보다는 그 안에 모셔져 있는 오백나한상으로 더 유명하다.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영산전 가득 모두 526분의 부처님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한 분 한 분의 부처님 제자들이 짓는 표정이 참 재미있고 정감이 간다.

영산전에 들어서 부처님께 절하고 오백 나한상 한 분 한 분마다 합장하고 서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은해사에 딸린 암자인 거조암 영산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위층 기단의 네 면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갔고, 밑면에 계단모양의 받침을 새겨 두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문화재자료  제104호 (영천시) 이다

    

 ▲ 거조암 다실

거조암은 대한 불교 조계종 10교구본사 은해사 말사이다. 원래는 은해사보다 먼저 세워져 거조사로 불렀는데 지금은 은해사의 말사가 되어 거조암으로 불려진다.  

 

▲ 거조암 다실에서

솔내음 가득한 천년의 고찰....거조암 다실에 걸려있는 문구이다.

 

▲ 원장님과 우리의 맏형

원장님과 우리 맏형 동호형님...원장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아마...박물대 생활 경험담과 발전을 위한 대화인듯...

  

▲ 거조암 앞에서 단체기념촬영

모두들 밝은 표정의 즐거운 모습들 아닌가? 거조암을 둘려보고 단체로 기념사진 한장 남기고 발길을 돌린다.

  

▲ 임고서원으로 가던중/버스안에서

임고서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파란하늘 저멀리 지평선 위로 먹구름띠가 형성된 풍경이 그림처럼 다가왔다..

 

▲ 임고서원 루각

임고서원(臨皐書院) 고려말의 충신(忠臣)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나...

버스에서 내리자 임고서원 입구에 멋진 루각이 턱 버티고 서있었다. 

 

  ▲ 임고서원으로 들어서는 일행들

 주변 환경 공사가 관계로 진입로가 엉망인 길을 따라 임고서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일행들이다.

 

 

 ↑ 임고서원 현판글

임고서원

 

 

 ↑ 입구루각

 

 ↑ 비각

  ↑ 가이드의 설명

↑ 임고서원을 둘려보고 있는 일행들

 

 ▲ 임고서원/시도기념물 제62호(영천시)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조선(朝鮮) 명종(明宗)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創建)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燒失)되어

선조(宣祖) 36년(1603)에 중건(重建), 사액(賜額)되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년(1337) 현 임고면(臨皐面)

우항동(愚巷洞)에서 일성군(日城君) 운관(云瓘)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9년(1360)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예문검열(藝文檢閱)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전법(典法)·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倭寇討伐)에 공(功)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地方官)의 비행(非行)을 근절(根絶)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貧民)을 구제(救濟)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始祖)로 추앙(推仰)되었고 시문(詩文),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高麗三隱)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恭讓王) 4년(1392)

이방원(李芳遠)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1401)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 임고서원 문충사 

문충사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1553년(명종 8)에 창건되었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155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에 옮겨 건립했다.

1643년(인조 21) 장현광(張顯光)을, 1727년(영조 3) 황보인(皇甫仁)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5년에 복원되었다.

 

 ▲ 문충사

 

▲ 문충사에 대한 설명

가이드로 부터 문충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이다. 한사람도 흐트러짐이 없이 귀 기울이고 있는 창원 박물대 동기생들...

 나 혼자만 마이동풍(馬耳東風) 이였지...

 

▲ 임고서원 돌담벽

임고서원을 들려싸고 있는 돌담벽...돌담이에 기와로 덮은 독특한 멋을 풍기는 담장...

나만의  느낌은 아님듯...동기생들 너 나 할것없이 카메라 앞에 서는 모습들을 모두 담아냈다.

 

 ▲ 문충사에서 바라본 임고사원 풍경

위 쪽에서 바라본 임고서원 풍경...최근 지붕을 보스한듯...깔끔한 기와 지붕들이다.

 

▲ 임고서원 좌측 돌담벽

왼쪽 편 돌담벽...비탈진 곳에 담을 쌓아 담장너머 나무가지와 어울러 더욱 운치를 다해주고 있었다. 

 

 

 ↑ 임고서원의 풍경1

↑ 임고서원 풍경2

 

  ▲ 임고서원 풍경

 

▲ 임고서원 비각에 대한 설명

  임고서원 비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안내원이다.

 

▲ 임고서원 앞에서

 또 다른 곳에서는 임고서원에 대한 설명을 하고있는 안내원이다.

 

 ▲ 안내원의 소개와 작별인사

 이제 안내원과의 작별시간이 온듯...하루종일 우리들을 안내하면서 정성을 다해 설명을 해준 가이드의 인사와

이에 대한 감사의 박수를 끝으로 영천문화유적 답사를 모두 마쳤다. 

 

 ▲ 입구 은행나무와 끼치집

 임고서원을 나서면서 입구 거대한 은행나무에 시선이 닿았다. 

나무 꼭대기 까치집만이 아쉬운 작별을 고하듯 우리 일행을 향해 하늘거리며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박물대 마지막 답사여행!!! 

오늘 답사는 솔직히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소중한 문화재를 주마간산 격으로 대충 둘려보며 

나만의 추억 만들기에 급급했음을 부인할수 없을 것이다.

그 동안 끝까지 함께했던 박물대 37기 동기생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한 시간들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동기생 여러분들과 맺은인연 가슴속에 소증히 담고 좋은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아울러

좋은 답사지를 선정하여 안내해주신 박동백 원장님 이하 문화원 직원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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