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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 세력과 훈척 세력의 대립--무오사화(戊午史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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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18. 7. 25.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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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 세력과 훈척 세력의 대립--무오사화(戊午史禍)

무오사화(戊午史禍)란?

조선 시대에는 모두 네 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다. 연산군 4년인 1498년의 무오사화,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 명종 즉위년(1545)의 을사사화가 그것이다. 사림(士林) 세력이 화를 입었다는 뜻에서 ‘사화(士禍)’라고 부른다. 다만 무오사화는 사초(史草)가 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배경

1474년 《경국대전》이 반포되다.
1480년 성종이 계비 윤씨를 폐출하고 사약을 내리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다.


설명

사림(士林)파가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9대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였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중앙 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공신 출신의 훈신(勳臣)과 국왕의 인척, 외척 출신인 척신(戚臣)의 위세를 견제하고 지배층의 토지 겸병(兼倂)과 서민 생활의 피폐 등 당시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김종직(金宗直)과 그 문하의 영남 사림들을 대거 등용한다.

이들 신진 사림들은 주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의 언론 3사(言論三司)에 임명돼 급속히 세력을 키워 갔으며, 이 과정에서 훈척(勳戚) 세력은 서서히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김종직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죽기 전에 지은 것으로, 항우가 초 의제를 빌어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글이다. 그가 죽은 후, 사관이었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글을 실음으로써 결국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성종에 이어 10대 연산군(燕山君)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이상적인 왕도 정치를 강조하며 끈질기게 간언하는 사림파는 연산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자연히 연산군과 사림파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고, 이 틈새를 훈척 세력이 파고들었다. 그 빌미가 된 것이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쓴 사초였다.

김일손은 자신이 사관이었던 당시 기록하였던 사초에 스승 김종직이 단종을 애도하며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秦)나라 항우(項羽)가 폐위한 초(楚)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단종을 의제, 세조를 항우에 비유한 것으로, 김종직은 이를 통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고, 그를 비난한 것이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에 이렇게 썼다.


어느 날 꿈에 한 신령이 나타나 “나는 초나라 회왕인데, 항우에게 살해되어 강물에 빠뜨려졌다.”라며 말하고는 사라졌다. 역사에는 강에 빠뜨렸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인, 의, 예, 지, 신의 법도가 어찌 중화에는 풍부하지만 동이에는 부족하며,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겠는가. 천 년 뒤의 동이사람이지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그런데 이 사초가 《성종실록》 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당시 실록 편찬 작업의 최고 책임자를 맡고 있던 훈신 이극돈(李克墩)은 이 사실을 알고 유자광(柳子光)의 집으로 달려갔다. 김일손의 사초에는 이극돈이 전라 감사로 있던 시절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중에 장흥 기생과 어울렸다는 김종직의 상소문도 포함돼 있었다. 또 유자광은 과거 김종직으로부터 “남이를 무고로 죽였다.”라는 비난을 받은 이후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한 뒤 연산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평소 사림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연산군은 김일손과 표연말(表沿末), 정여창(鄭汝昌), 최부(崔溥) 등 김종직 일파 20여 명을 비롯해 모두 40여 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시켰다. 조정에 있던 대다수의 신진 사림이 이때 화를 입었다. 이미 6년 전 죽은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해서는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신을 참수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을 내렸다. 이것이 무오년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전말이다.

무오사화는 사림 세력의 정치적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훈척 세력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라는 성격을 띤다. 무오사화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훈척 세력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6년 뒤 조정에는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불어 훈신 세력이 화를 입게 된다.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되자 조정에는 언론 기능이 상실됐고, 연산군은 날마다 연회를 열어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 모았으며,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다. 방탕하고 사치스런 생활로 급기야 국고가 바닥날 지경에 이르자, 연산군은 훈신들에게 공신전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며 노비를 몰수하기도 했다.

이즈음에 훈척 세력은 척신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육조에 포진한 훈신 중심의 부중파(府中派)로 나뉘었다. 부중파는 처음에는 궁중파처럼 연산군의 행태를 방관했으나, 공신전을 요구받으면서 연산군에게 불만을 갖는다. 당장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부중파는 연산군에게 향락 생활을 자제할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연산군과 부중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빚자, 이번에는 궁중파가 이를 이용해 부중파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廢妃), 사사(賜死) 문제였다. 생모 윤씨는 투기를 부려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기는 바람에 폐비가 된 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윤씨의 폐비론을 가장 강력하게 들고 나왔던 사람은 윤씨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였다. 윤필상 등 훈구 세력도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김종직 문하의 사림 세력까지 폐비론에 가세했다. 당시 네 살이던 연산군은 뒤이어 왕비가 된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손에서 자랐으며, 생모 윤씨의 폐비 및 사사에 얽힌 구체적인 정황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예종과 성종의 외척인 임사홍(任士洪)은 윤씨의 폐비, 사사에 얽힌 전말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였다. 그 후폭풍은 엄청났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때보다 훨씬 많은 인사들을 처단했다. 윤씨 폐출에 관여한 성종의 후궁들을 참하고, 인수대비를 때려 죽게 했다.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찬성하거나 이를 방관한 윤필상,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김굉필(金宏弼) 등 10여 명을 사형하고,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을 부관참시했다. 연산군의 숙청 작업은 1504년 3월부터 무려 7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를 두고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한다.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부중 세력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으로, 이를 통해 연산군은 훈신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척신 세력을 적극 등용해 친위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을 폐지하고, 정치 논쟁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경연(經筵)을 중지시켰다. 비판 세력이 대부분 제거된 상황이어서, 연산군의 방탕 생활은 더욱 심해지고 이로 인해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사냥을 위해 도성 밖 30리에 걸쳐 민가를 철거하고, 기생과 전국의 미녀들을 불러 연일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으며, 그 경비를 마련하려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공물을 바치게 했다. 훈민정음으로 쓴 비난 투서가 잇따르자, 훈민정음을 사용하거나 학습하지 못하도록 하고, 관련 서적을 불태웠다.


연산군의 학정이 극에 달하자, 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연산군의 행태를 비판하다 한직으로 좌천된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이 1506년에 마침내 거사를 실행하였다. 성희안은 무신 출신인 박원종(朴元宗)과 신망이 높은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을 끌어들이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군기시검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등을 포섭했다. 이들은 군사를 일으킨 뒤 우선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晋城大君)에게 거사 사실을 알리고,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 신수영(愼守英) 형제와 임사홍을 처단했다.

이어서 신윤무 등의 도움으로 궁궐 안으로 진입해 정현왕후 윤씨를 설득, 진성대군이 왕위를 잇도록 교지를 내리게 했다. 결국 연산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돼 강화도 교동으로 추방됐다. 별다른 저항이나 충돌 없이 거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다음 날 진성대군이 11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에 올랐다. 이것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조선왕조에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바꾼 첫 번째 사건이다. 왕조를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역성혁명과는 차이가 난다.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물리치고 옳은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반정의 대열에 신하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조선 시대 군신 간의 권력 관계가 서서히 재편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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