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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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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18. 7. 25.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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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필(直筆)의 사관(史官), 사화(士禍)에 희생되다

김일손(金馹孫)

1498년(연산군 4)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장본인은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史官)으로 있었던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사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 훈구파의 정치 공작으로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고, 그의 스승인 김종직 마저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았던 그의 직필(直筆) 정신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후대까지도 그를 널리 기억하게 하였다.

영남사림파의 기수, 중앙으로 진출하다 


15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사는 기성의 정치세력인 훈구파에 대항하는 사림파의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성종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기존에 정치적ㆍ사회적 특권을 향유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특히 이들은 언관이나 사관과 같이 비판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직책에 포진되어 훈구파의 기득권 비리에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사림파의 맹장 중에 바로 김일손이 있었다.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며 소장 영남 사림파의 리더로 활약했던 김일손은 언관과 사관으로 있으면서 기성의 잘못된 정치 형태를 고발하려 했다. 이것은 그가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의 비행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싣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실록의 편집이 끝나면 세초(洗草- 실록 편찬이 완료된 뒤 사초를 없애는 일)를 하여 비밀리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 원칙인 그의 사초가 훈구파들에 의해 입수되어 정치적 참극이 일어났다. 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사람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의 서막을 연 사건이기도 하였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이다. 조부인 김극일(金克一)은 길재(吉再)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부친 김맹(金孟) 역시 가학을 계승하고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일손 또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김일손 가문은 정통 영남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셈이 된다. 어린 시절 김일손은 부친을 따라 용인에서 살았으며, 이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학]은 사림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영남사림파의 대표학자 김굉필(金宏弼)은 ‘소학동자’로 까지 지칭되었다. 15세에는 단양 우씨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이해 고향 청도를 거쳐 선산에 사는 정중호(鄭仲虎), 이맹전(李孟專)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16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예조의 복시(覆試)에는 실패했다.

17세 때 고향에 돌아온 김일손은 그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이 있는 밀양으로 가서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김종직은 김일손의 부친 김맹의 [효문명(孝文銘)]에서 청도에서 올라온 김극일의 두 손자 김기손(金驥孫)과 김일손을 가르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472년 김종직은 지리산을 다녀온 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는데, 김일손 역시 1489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지리산을 사랑하고 기행문을 남긴 것 또한 스승과 제자가 하나였던 셈이다. 밀양에 살던 김종직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인연은 김종직의 사후 때까지 끈끈하게 이어진다.

김일손은 23세가 되던 1486년 청도군학(淸道郡學)으로 있으면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다. 생원시는 장원, 진사시는 차석이었다. 이해 가을의 문과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료로서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던 최부, 신종호, 표연수도 함께 급제하였다. 1487년 김일손은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진주목사와 진양수계(晉陽修稧)를 조직하였으며,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해 나갔다. 이후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자,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적극적이고 강직한 사림파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490년 무렵부터는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교정하고 증보(增補- 모자란 내용을 보탬)했다. 소릉(昭陵-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능)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수양대군의 불법적인 왕위찬탈을 비판하고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조처로서, 나아가서는 세조의 집권을 돕고, 그 그늘에서 크게 권력을 차지한 훈구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김일손에 대해서는 무오사화의 대표적인 희생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관으로서의 그의 강직한 면모만이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문장을 쓰려고 붓을 들면 수많은 말들이 풍우같이 쏟아지고 분망하고 웅혼함이 압도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개혁책 제시에도 적극적이었다. 실록이나 그의 문집인 [탁영집(濯纓集)], 그의 조카인 김대유의 [삼족당집(三足堂集)]등의 기록에는 이러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김대유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쓰면서 김일손의 호매하고 강직한 성품과 함께 경제지책(經濟之策)을 품고 있었음을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실록에서 그가 제시한 여러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인사정책에 대해서는 효행과 염치가 뛰어난 자와 재질이 훌륭한 종실(宗室- 왕족)의 등용, 천거제의 충실한 활용 등을 주장했는데 이는 훗날 조광조 일파가 주장한 천거제의 논리와도 유사하다. 또한 언관의 활동 보장과 지방관의 사관 발탁 등을 건의하여 언론권의 강화를 주장하였고, 법전을 지방 관아에서 충분히 활용할 것, 사원전과 서원 노비의 혁파 등을 건의하였다. 국방대책으로는 무예가 뛰어난 문관을 뽑아 변방의 장수에 제수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방비할 것을 제시하고 당시 충주나 웅천에서 있었던 왜인들의 소란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한 응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후에도 왜구들의 소요가 계속 일어났고 1592년 임진왜란까지 일어났음을 고려하면 선견지명을 보인 셈이다.


 

위험한 사초(史草),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사림파의 기수로 우뚝 선 김일손은 가장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시무책을 제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활동의 선두에 섰다. 그가 제기한 소릉 복위 문제는 정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릉은 문종비 권씨의 위호로서 권씨는 단종을 낳은 후 곧 죽었는데 세조 집권 후 추폐(追廢)되어 종묘에는 문종의 신위만이 배향되어 있었다. 김일손은 소릉과 묘주(廟主)를 복위하여 문종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세조의 그늘이 여전했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매우 개혁적인 주장이었다. 언관으로서 그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에 비례하여, 그에 대한 훈구파의 기피는 훨씬 커지게 되었다. 훈구파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그의 강한 기질과 직선적 성향은 훈구파 대신들에게 김일손을 정치적 공적(公敵)으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무오사화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사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림파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정쟁이다. 또한 이후 4번에 걸친 사화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발단에 섰던 인물이 바로 김일손이었다. 무오사화의 시작은 성종 사망 후 실록청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망하면 바로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초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미리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권력을 누려온 전형적인 훈구파였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는 이극돈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때 불교중흥 정책을 편 세조의 눈에 들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것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의 위험한(?) 사초를 입수한 이극돈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일손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이극돈은 검증된 정치 공작의 귀재 유자광(柳子光)을 찾았다. 유자광은 궁중에 자신과 연계하고 있던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여 김일손 등이 사초에 궁금비사(宮禁秘史)를 써서 조정을 비난했다는 내용을 올려 연산군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마침내 왕에게 올리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다. 독재군주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 셈이다.

김일손의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승려 학조(學祖)가 술법으로 궁액(宮掖)을 움직이고, 세조의 총신이자 훈구파인 권람(權擥)이 노산군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노비와 전답을 취한 일 등 세조대의 불교 중흥책과 훈구파의 전횡을 비판한 글과,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 사절(死節- 절개를 위해 목숨을 버림)로 기록하고 이개, 박팽년 등 절의파의 행적을 긍정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세조의 왕의 찬탈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사림파의 입장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진나라 말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이 글은 바로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글이었다. 당시 김일손은 모친상으로 청도에 내려가 있었지만 바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손한 언행이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사림파의 일망타진에 나섰다.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표연말, 정여창, 최부, 김굉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다. 김종직마저 그의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고 다시 처형하는 최악의 형벌인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이것이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로서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사림파 성장의 자양분이 되다

 

김일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자계서원. 무오사화로 화를 입은 후 서원 앞을 흐르는 냇물이 3일 동안 붉게 변한 데서 ‘자계’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소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무오사화의 칼끝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김일손의 생을 마감하게 했다. 김일손이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을 흘렀다고 해서 ‘자계(紫溪- 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그를 배향한 사당도 자계사(紫溪祠)가 되었다. 자계사는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구현된 선조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661년(현종 2) ‘자계’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김일손의 추숭 작업에 가장 힘을 기울였던 인물은 조카 김대유(金大有, 1479~1551)이다. 김대유는 40세 때 청도의 사림들과 함께 자계사를 건립하였으며,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거듭 사직하고 숙부의 뜻을 받들며 처사(處士)의 삶을 살아갔다. 김대유는 41세 때 김일손의 유고(遺稿)를 모아 자계사에서 판각(板刻)을 했으며, 70세 되던 해에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편집하였다. 그만큼 숙부를 존경하고 그의 정신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김대유는 경상우도 사림의 종장(宗匠- 경학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우두머리)이 되는 남명 조식이 존경했던 인물로서, 김일손의 사림파 정신은 김대유를 거쳐 조식으로 이어지면서 영남사림파의 학맥에 큰 분수령을 이루었다. 조식은 김일손에 대해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凌霜之節)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서 훈구파의 전횡에 맞섰던 김일손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은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반영하였다. 훈구파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상과, 정치이념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선봉에 서서 김일손은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였고 적극적인 언관과 사관 활동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적극 맞섰다. 김일손처럼 행동하는 사림파의 모습은 훗날 조광조에게도 이어졌고, 결국에는 네 번의 사화라는 대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가 궁극적으로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사림파의 도도한 성장에 훌륭한 자양분을 마려해준 학자 김일손. 그가 배향되어 있는 청도의 자계서원을 찾아, 붉은 시냇물처럼 타올랐던 김일손의 붉은 마음을 되새겨보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민족문화연구소, [탁영 김일손의 문학과 사상], 영남대학교출판부, 1998.



김일손

동의어 계운(季雲),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 문민(文愍) 다른 표기 언어 金馹孫

시대 조선
출생1464년(세조 10)
사망1498년(연산군 4)
경력 주서, 정언, 이조좌랑, 이조정랑
유형 인물
관련 사건 무오사화, 중종반정
직업 문신
대표작 탁영집
성별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본관 김해(金海)

요약 1464(세조 10)∼1498(연산군 4).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 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 권세가 있는 귀족으로 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김극일(金克一)로부터 『소학(小學)』·사서(四書)·『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 자기 자신을 닦으면서 수양함)’를 지향하는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 남을 다스리는 정치)’을 지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會老堂記)」·「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탁영집(濯纓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백허정집(白虛亭集)』
  •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경현록(景賢錄)』
  • 『속동문선(續東文選)』
  • 『해동잡록(海東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선전기 기호사림파 연구』(이병휴, 일조각, 1984)


김일손 연보

본관 김해. 자, 계운(季雲). 호, 탁영(濯纓)


1464년(세조 10) 출생

1478년(성종 9) 15세 단양 우씨와 혼인. 선산의 이맹전 배알

1480년(성종 11) 밀양으로 김종직을 찾아가 배움

1481년(성종 12) 남효온과 함께 원주의 원호를 배알

1482년(성종 13) 두 형, 김준손과 김기손 문과 급제

1483년(성종 14) 부친상

1486년(성종 17) 문과 급제. 남효온과 함께 파주의 성담수 배알

1487년(성종 18) 가을 진주향교 교수, 함안의 조려 배알

1489년(성종 20) 11월 요동질정관(1차 북경행)


1490년(성종 21) 3월 노산군 '입후치제(立後致祭)' 주장
                        4월『육신전』첨삭
                        9월 김시습·남효온과 중흥사 회합.
                       11월 진하사 서장관(2차 북경행)


1491년(성종 22) 『소학집설(小學集說)』 교정
                       10월 충청도 도사, 소릉복위 상소(1차)


1492년(성종 23) 김종직·김기손·남효온 별세

1493년(성종 24) 가을 독서당 생활, 「추회부」지음

1494년(성종 25) 12월 성종 승하

1495년(연산 1) 5월 시폐(時弊) 26개조 상소 중 소릉복위 주장(2차)
                      가을「질풍지경초부(疾風知勁草賦)」지음

1496년(연산 2) 정월 소릉복위 상소(3차). 3월 모친상

1498년(연산 4) 봄 「유월궁부(遊月宮賦)」「취성정부(聚星亭賦)」지음.
                        7월 능지처사(陵遲處死)

프롤로그

김일손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재덕과 기상을 타고났으며, 백성을 아끼는 성찰과 희망을 담아낸 문장으로 일세를 격동시켰다. 세상을 향한 포부와 소망은 웅대하고 간절하였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의로운 선후배 동료가 있어 서로 힘이 되었으며, 훗날의 재상감으로 기대한 성종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분주하였다.

김일손은 현실의 질곡과 훈구대신의 오만이 세조의 정변과 즉위가 빚어낸 어두운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았다. 또한 임금 앞의 번듯한 너스레가 부패와 탐욕을 숨기는 거짓의 세월을 언제 마감할까, 나아가 유자의 진정한 길과 관료의 참된 삶이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항상 고뇌하였다. 그만큼 고통의 길이었다.

김일손은 기억하지 못하면 내일이 없고, 올바른 기록이 없으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할 수 없다는 역사투쟁의 선봉이었다. 특히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전문을 실은 사건은 몰래 부르는 슬픈 기억의 노래를 내일의 희망을 위한 불멸의 서사로 오래도록 살린 쾌거였다.



김일손의 친필

 김일손↑                

김일손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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