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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저산서원(楮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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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18. 11. 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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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저산서원(山書院)


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유등리 332(大山面 柳等里 332)번지에는 김해김씨 삼현파의 중시조를 모신 1989년(乙未年)에 창건한 저산서원(楮山書院)이 넓은 들판에 세워져 있다. 문정공 정성헌 김관(文貞公 靖醒軒 金菅)을 주향으로 하여, 명회재 김문숙(明晦齋 金文淑), 판관 둔웅 김항(判官 遯翁 金伉) 현감 퇴평 김서(縣監 退平 金湑)를 배향하는 곳으로 향사일(享祀日)은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 : 첫 번째 丁일)이다.


저산서원(楮山書院) 현판문


저산서원(楮山書院) 입구


경앙문(京仰門) 저산서원(楮山書院) 입구 현판문


 저산서원(楮山書院) 입구 건물 모습(우측에서 바라본 모습)


 저산서원(楮山書院) 입구 건물 모습(좌측에서 바라본 모습)


 저산서원(楮山書院)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저산서원(楮山書院)은 외삼문·강당·내삼문·사우가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강당인 홍인당(弘仁堂) 앞마당을 마주하고 있는 동재(東齋)는 소원당(溯源堂)이라하고, 서재(西齋)는 돈서헌(敦敍軒)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홍인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가운데 세 칸은 방이고 양쪽 끝은 마루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이고, 사우(祠宇)인 경덕사(景德祠)는 정면 3칸·측면 2칸이며, 경덕사 마당에 있는 전사청(典祀廳)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중앙의 1칸은 마루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건물 구조와 함께, 주위의 여러 단(壇)과 비(碑)가 갖추어져 있다.

[출처 :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저산서원(楮山書院) 현판문

강당인 홍인당(弘仁堂)에 정면의 현판은 저산서원(楮山書院)이라 쓰여 있고, 건물 대들보에 걸려 있는 현판은 저산재(猪山齋)라 적고 있어 각각의 첫 글자가 楮(닥나무 저)와 猪(돼지 저,암퇘지 차)로 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저산서원(楮山書院) 좌측에서 바라본 모습


 저산서원(楮山書院) 좌측 다른 각도로 바라본 모습


 소원당(溯源堂)

저산서원(楮山書院) 홍인당(弘仁堂) 앞마당을 마주하고 있는 동재(東齋)를 소원당(溯源堂)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소원당(溯源堂)에서 바라본 홍인당(弘仁堂)


 홍인당(弘仁堂) 앞에서 바라본 소원당(溯源堂)의 모습 


 소원당(溯源堂) 현판문


 홍인당(弘仁堂)에서 바라본 소원당(溯源堂)의 모습


 입구 우측에서 바라본 소원당(溯源堂)의 옆 건물 모습


 서재(西齋)인 돈서헌(敦敍軒)에서 바라본 소원당(溯源堂)의 모습


 돈서헌(敦敍軒)

홍인당(弘仁堂) 서쪽에 배치된 돈서헌(敦敍軒)의 모습 동쪽 소원당(溯源堂)과 마주하고 있음


 홍인당(弘仁堂) 뒷편 경덕사(景德祠)로 들어가는 담벽과 문 


 홍인당(弘仁堂) 뒷편 경덕사(景德祠)로 들어가는 정문 


 경덕사(景德祠)

홍인당(弘仁堂) 뒷편 정문으로 들어서서 바라본 모습 


 경덕사(景德祠) 현판문


 경덕사(景德祠)

바른 방향에서 바라본 경덕사(景德祠)의 모습 


 옆에서 바라본 경덕사(景德祠) 현판문

 

 경덕사(景德祠) 정문의 모습


 홍인당(弘仁堂) 안 우측에서 바라본 정문 모습


 홍인당(弘仁堂) 안 좌측에서 바라본 정문 모습


 저산서원(楮山書院) 밖 에서 바라본 소원당(溯源堂)과 홍인당(弘仁堂)의 모습


 소원당(溯源堂) 뒷편에 자리하고 있는 지단


 저산서원(楮山書院) 헌성록


 저산서원(楮山書院) 창건 헌성록

 서기1989년 10월4일 낙성이란 글이 새겨져 있음.


 저산서원(楮山書院) 창건 헌금을 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지단(之檀)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 지단(之檀) 장성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지단(之檀) 장성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 지단(之檀)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 지단(之檀) 뒷면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지단(之檀)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지단(之檀) 뒷면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지단(之檀) 모습

뒷편 건물이 저산서원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지단(之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저산서원(楮山書院) 정문


 저산서원(楮山書院) 정문 앞에 있는 정각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신도비각(神碑閣)


 판도판서(版圖判書)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신도비문(神碑文)

현대에 건립된 저산서원은 강학의 기능보다 봉사에 의의가 있다. 제향된 인물들은 고려 후기에 관직에 올랐던 사람으로서, 유학을 존숭한 당시의 신유학자들이다. 저산서원이 있는 경상남도 창원시 대산면 유등리에는 저산서원을 중심으로 그 앞에 김관 신도비, 숭조돈종비(崇祖敦宗碑) 등이 있어 지역 유교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신도비각(神碑閣)과 은행나무


 저산서원(楮山書院) 담벽/정문 좌측에서 바라본 모습


 저산서원(楮山書院) 담벽/밖에서 바라본 모습


 저산서원(楮山書院)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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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世) 관(管)

김관(金管)→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일명 삼현파(三賢派)

자(字)는 희범(希範), 호(號)는 정성헌(靖醒軒),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

초명(初名)은 관(館), "管"은 왕의 하사명(下賜名).


뛰어난 경륜과 확고한 소신으로 진퇴를 분명히했던 판도판서(版圖判書) 조선으로 치면 영의정(領議政),   지금의 재무장관(財務長官)

급의 벼슬이다.

김관(金管)은 고려 고종 37년(1250년) 김용직(金龍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非凡)하여 8세에 입학(入學)하여 한번 들은것은 이를 모두 깨우쳐 스승을 놀라게 하였고 제반 행실(行實)이 단정(端整)하여 다른사람의 모범(模範)이 되었다 한다.


고려 원종(元宗) 7년 (1266년) 그의 나이 17세로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 교서랑(校書郞)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이때 안향(安珦)이 그의 재주를 높이사서 친교(親交)를 맺으니 두사람은 틈틈히 만나서 서로 학문(學問)을 논(論)하며 남다른 교분(交分)을 이어 갔다.

원종(元宗) 11년(12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안향(安珦)이 강화(江華)의 적중(敵中)에 억류되니 그는 온갖 지혜(知慧)를 다해 안향(安珦)을 구출(救出)하였던바 왕(王)이 감동(感動)하여 그에게 상을 내림.

7년뒤 충렬왕(忠烈王) 3년 (1277년)에 판도좌랑(判圖佐郞)에 이어 감찰(監察)어사(御史),국자(國子)사업(司業)에 올랐다.

충렬왕(忠烈王)15년(1289년) 그는 안향(安珦)과 함께 충선왕(忠宣王)을 호종(扈從)하여 원(元)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에 머무는 동안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이를 안향(安珦)과 함께 수록(手錄)하여 왔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온 시초(始初)가 된다.


그는 충렬왕(忠烈王) 16년(1290년) 밀직시사(密直司事)가 되고 8년후에는 다시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 나라를 다녀왔다. 충렬왕(忠烈王) 27년(1301년) 도성(都城)에 불이 나서 궁전(宮殿)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을때 그는 일신의 위험(危險)을 돌보지 아니하고 화염속에 갇힌 왕(王)을 구출(救出)하였다.

충혜왕(忠惠王) 복위 4년(1343년)원(元)의 사신(使臣)이 와서 고려(高麗)의 충혜왕을 붙잡아가서 (계양(계揚): 중국어 광동성(廣東省)으로 유배(流配)를 배종하였다.  


이듬해 중국의 악양(岳陽)땅에서 충혜왕이 죽자 그는 원(元)의 조정(朝廷)에 나아가 자신(自身)을 인질(人質)로 하고 충혜왕의 시신(屍身)을

고려(高麗)로 보내어 장사(葬事)지내게 해 달라고 간청(懇請)하였다.

원(元)나라의 조정(朝廷)은 이러한 그의 충성(忠誠)에 감동(感動)하여 충혜왕의 시신(屍身)과 함께 그의 환국(還國)을 허락(許諾)하였다.

충목왕(忠穆王) 1년(1345년)그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궤장(궤杖)을 하사(下賜)받고 3년뒤 98세의 장수(長壽)를 누리고 파란의 생애(生涯)를

마치니 이때가 충목왕(忠穆王) 4년(1348년) 2월 이였다. 왕은 이인복(李仁復)을 보내어 애도의 뜻을 표하고 문정공(文貞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창원시 대산면(大山面) 저소산(楮沼山)에 묻혔으니, 지금 대산면 유등리에 묘(墓)가 남아 있다.

일찌기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국자사(國子師)에 이르렀고, 충선왕(忠宣王) 때에 누차 왕에게 간(諫)하여 부도(浮屠:불교)를 배척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다.


후예 중에 한국 역사상

대표적 효자인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

해동의 직필사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등

한 집안 4대에 걸쳐 3 현인이 배출되었다 하여 일명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라 하며, 공을 삼현파의 중조로 받들고 있다.


2세(世) 문숙(文淑)

자는 경선(景善) 또는 아숙(雅淑)이고, 호는 명회재(明晦齋)이다.

중시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아들로 태어남.


아버지 諱 管(판도판서, 삼현파 1세), 어머니 貞夫人 羅州林氏(대사성 의충의 딸)의 장자로 고려 충렬왕 癸巳年에 生하시니, 字는

아숙(雅淑)입니다.

학문이 깊어 齋生과 儒生들이 公을 공경하여 따랐습니다.

서기 1345년에 아버지 정성공이 享壽 96세로 卒하시니, 왕이 예관 이인복과, 이제현에게 명하여 김해 저소산에 예장을 한 후, 아버지 여읨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다가 쇠약하여 그후 2달여 만에 卒하시니 김해 저소산 先塋下에 장사하였습니다.  배위는 목사 萬善(만선)의 따님으로

貞夫人 서산유씨이니 슬하에 1남을 두었습니다.


충렬왕(忠烈王) 때인 서기 1293년에 출생하여 어머니 나주임씨(羅州林氏)의 철저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문숙(文淑)은 일찍이 안회헌(安晦軒)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경덕재생(經德齋生)이 되었다. 충선왕 때 현량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가 한림원으로 옮겨서

칠재(七齋: 고려 때 국학(國學)에 설치한 주역(周易), 서경(書經), 시전(詩傳), 주례(周禮), 예기(禮記), 춘추(春秋), 병학(兵學) 등 7개 과목)

에서 경서(經書)를 강독하니 재생(齋生)과 사우(士友)들이 즐겨 따랐다.


역동(易東) 우탁(禹倬),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 동암(東庵) 이진(李瑱),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등과 경전을 강마(講磨)하고

도의로 교유(交遊)하였고, 명도(明道: 북송(北宋)의 대유(大儒) 정호(程顥))선생의 역학(易學: 주역을 연구하는 학문)과 주자(朱子)의 신서(新書)를 깊이 연구하여 그 이치(理致)에 통달하니 당시 제현(諸賢)들이 선생의 호를 명회(明晦)로 칭하였다.


부친 판서공(判書公)이 왕을 모시고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그 때에는 배행(陪行)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판서공이 국상(國喪: 충혜왕(忠惠王)이 악양(岳陽)에서 승하)을 당한 것을 애통해 하다가 1345년에 별세하니, 선생은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다가 상복(喪服)을 벋은 지

두어 달 만인 서기 1348년 4월 10일 향년 56세로 별세하였다.


3세(世) 항(伉) 

자는 이정(而正), 호는 둔옹(遯翁).

중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손자이며, 2세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의 아들이다.

자는 이정(而正)이고 호는 둔옹(遯翁)이다.


충숙왕(忠肅王) 때인 서기 1326년 9월 28일에 출생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등제(登第)하여

도제고판관(都祭庫判官: 종5품)을 지냈으며, 신병으로 귀향(歸鄕)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정4품)

유학제거(儒學提擧)를 제수(除授)하니 왕에게 글을 올려 아뢰기를 “전하는 성학(聖學: 유학)을 숭상(崇尙)하고 선불(仙佛)을 배척(排斥)하면

국법이 잡히고 인륜도 바르게 될 것이니, 부역(負役)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유연(遊宴)을 금하고 사치를 끊어

몸소 시무(時務)를 살피면 나라가 저절로 부(富)하고 병사(兵士)도 저절로 강해질 것이니 선악(善惡)과 안위(安危)를 잘 분간(分揀)하소서”

하니 왕이 받아들여 후한 상을 내렸다.


스승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정3품)이 되어 경술(經術: 경학(經學), 경서(經書)에 관한 학문)이 높은 선비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등을 천거해 학관(學官)을 삼아 명륜당(明倫堂)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과 도교(道交)하게 되었고, 신돈(辛旽)의 횡포를 저지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언(諫言)하다

가 뜻을 거슬러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소미동(小微洞)에 은거(隱居)하였으며 이씨조선(李氏朝鮮)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는 이정(而正)이고 호는 둔옹(遯翁)이다.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은 도제고판관(都制鋯判官)을 지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과 승유(勝遊)하면서 별산군(鱉山郡: 청도)을 지나다가 소미동(小微洞) 삼성산(三省山)의 청수(淸遂: 맑고

그윽함)함을 보고 집 한 채를 지어 아들 서(湑)에게 먼저 이주하도록 명하고, 우왕(禑王) 8년 서기 1382년에 전 가족이 이거(移居)하였고,

그해 10월 10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유명(遺命)에 의하여 김해부(金海府) 저복동 선영하(先塋下)에 반장(返葬: 객사한 사람을 옮겨

장사함)하였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고씨(高氏)로 동년(同年) 7월 17일 별세하였고, 부친은 학사(學士: 정4품)를 지낸 고지린(高知麟)이며 묘는 동원(同原)이다.」  


4세(世) 서(湑) 

자는 원윤(遠允) 호는 퇴평(退平).

중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증손(曾孫)이며, 3세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아들이다. 자는 원윤(遠允)이고 호는 퇴평(退平)이다.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3년 서기 1342년 5월 3일에 출생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에게 수학하였고,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였다. 등제(登第)하여 의흥현감(義興縣監: 종6품)에 제수(除授)되어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백성들에게 크게 교화(敎化)가 되고 잘 다스려 이민(吏民)이 신군(神君)처럼 모셨고 청백리(淸白吏)로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선생은 서기 1380년 제야(除夜: 섣달 그믐날 밤) 꿈에 태학(太學=성균관)에 들렸는데 주자(朱子)가 소학(小學) 일부를 주면서 ‘장차 효자(孝子) 아들이 이 책을 알리리라’하였다. 그 후 14개월 만인 서기 1382년 2월에 과연 아들 극일(克一)을 낳았는데, 이분이 한국 역사상 대표적인 효자 절효(節孝)선생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는 원윤(遠允)이고 호는 퇴평(退平)이다. 충혜왕(忠惠王) 복위 3년 서기 1342년 5월 3일에 출생하였고,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재(宰: 지방장관을 뜻함, 현감(縣監))에 올랐다. 서기 1374년에 조정(朝廷)의 조짐(공민왕 시해(弑害))를 보고 은퇴하여

전리(田里: 고향)에 살았다.


서기 1375년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소인(小人)들을 배척(排斥)하고 성리학(性理學)을 일으켰으며, 서기 1380년 제야(除夜)의

꿈에 태학(太學)에 들렸는데 주자(朱子)가 소학(小學) 일부를 주면서 ‘장차 아들이 이 책을 알리리라’하였다.

그 후 14일 만에 아들 극일(克一)을 낳았다.


조선태조(朝鮮太祖) 1394년 4월 4일에 포은선생을 조상(弔喪)하고 오늘 길에 상주(尙州)에 들렸더니 제유(諸儒)들이 고려조(高麗朝)의 부흥책(復興策)을 묻기에 주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 오성(五星)이 모인 것으로 답하였다(기운(氣運)이 새 왕조(王朝)에게 기울었다는 뜻). 태종조(太宗朝)에 성익대좌리공신(誠翊戴佐理功臣)으로 추천되었고 분성군(盆城君)에 봉군(封君)되니 그 일이 회맹록(會盟錄)에 기록되어 있다. 의흥현감에서 부임하여 신(神)이 보듯 모든 것을 감식(鑑識)하여 교화(敎化)가 행하여 진 지 수개월에 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선생은 성품과 도량(度量)이 순후(淳厚: 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움)하여 봉록(俸祿)으로 영광을 삼지 않고 초야(草野)로 돌아와서는 덕(德)을 심고 업보(業報)를 끼치며 자제들을 지극히 교훈시키고, 날마다 정관(整冠)하고 단정히 앉아 거문고와 책을 즐겼으며, 혹은 산천지간(山川之間)에 읊조리며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였다.


세종(世宗)때인 서기 1420년 10월 12일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묘는 나복산(籮䈏山) 호점혈(虎占穴) 갑좌(甲坐)이며, 서기 1842년에 백동사(栢洞祠)에 모셔 제향(祭享)한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정3품 당상관(堂上官) 아내의 봉작) 밀양박씨(密陽朴氏)로 병신(丙申)년 9월 9일에 별세하였다. 부친은 중서내령(中書內令: 종1품)을 지낸 박천봉(朴天鳳)이다. 묘는 쌍분(雙墳)의 부좌(祔左:합사)이며 호랑이의 가르침을 따라 토석(土石)을 쌓아 올려 방분(方墳: 모양이 네모진 무덤, 고분(古墳) 분류의 한 가지)을 만들었다.

조선 세종 更子年(서기 1420년) 10월  20일에 卒하시니 享壽79歲입니다.

묘소는 청도군 각북면 나복산에 있으며, 배위는 淑夫人 밀양박씨로 슬하에 諱 克一,  兌一등 2남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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