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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길을 묻다-탁영 김일손 展

☞나의 포토갤러리/나의족보·삼현파

by 산과벗 2020. 1. 1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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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길을 묻다-탁영 김일손

 

지난 20166. 내가 사는 청도의 기미년 장연리 3·1 만세운동의 주동자인 김집이(金集伊)의 흔적을 찾아 그가 경작하던 토지의 지주이자 모계학원 설립자인 김경곤(金景坤) 선생이 살았던 청도군 이서면 토평리 백곡 마을을 찾았다가 마침 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탁영종택(濯纓宗宅)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1464~1498) 선생은 내 고향 김해에서 더 알려진 인물이다. 대성인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삼현파(三賢派) 문중 사람들이 김해에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주위 분들로부터 삼현인 모암 김극일(慕庵 金克一),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 선생과 아울러 그 명성을 귀동냥으로 들어왔다.

 

먼저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탁영 김일손 선생이 걸어온 선비의 길을 찾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김일손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지금의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조할아버지는 포은 정몽주와 교유한 김항(金伉)으로 청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할아버지는 모암 김극일(金克一)로 야은 길재(吉再)에게 수학했고 효성이 지극하여 절효(節孝)라고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남계 김맹(金孟)으로 김숙자(金叔滋)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또한 형인 김준손과 김기손도 정시(庭試)에 합격함으로써 가문 전체가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김일손 선생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소학과 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7세 때부터 경술과 문장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권오복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갈고닦았다. 이 시기의 수학 경험은 이후 김일손 선생의 생애를 통하여 사고와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1486(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운계 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 좌랑·이조 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 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 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관인으로서 김일손의 품계는 정5품을 넘어서지 못한 낭관(郎官)이었으나 청요직인 문한(文翰언론 삼사·전관(銓官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상제와 관제, 인재 등용 제도를 비롯하여 사회·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구를 건의하고, 노산군(魯山君) 입후(立後)를 최초로 거론한 것, 무오사화의 빌미가 된 훈구파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고발하고 스승인 점필재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올린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김일손의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면서도 진취적이었다.

 

김일손 선생의 학문과 저술 활동을 살펴보면, 학문과 문학은 도본 문말(道本文末)의 입장을 견지했고, ··의 등 유교적 실천 윤리로서의 도의 실현이 김일손의 문학적 지향이었다. 김일손의 생애에 따라 살펴보면, 수학기(修學期)의 작품에서는 왕조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려는 치도(治道)의 의지와 비분강개함을 담고 있다.

 

사환기(仕宦期)의 작품에서는 성리학적 질서를 뿌리내리려는 의도와 자신감, 웅혼한 기상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사직기(辭職期)의 작품에서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고뇌 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두류산과 가야산을 유람하고 쓴 산문과 시에 보이는 웅혼한 기상과 단종에 대한 충절을 드러낸 시()와 사()에 나타난 비분, 연산군 시대에 쓴 시와 부()에 드러난 회한(悔恨)의 정회는 강정한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21책이 전한다. 1519년 초간본은 조카 김대유가 간행하였고,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서문을 지었다. 1668년 중간본에는 우암 송시열의 서문이 붙어 있다. 자계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이후 권수와 책수를 달리하여 몇 차례 더 간행되었다. 그리고 회로당기(會老堂記)’·‘속두류록(續頭流錄)’ 26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김일손 선생은 청도 출신 중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한 분이다. 1498년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발단되어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사형을 당하였다. 김일손의 죽음은 김해 김씨 일족뿐만 아니라 지역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청도 지역에 16세기 이후 은거의 풍토가 유행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무오사화 때 해를 입고 양주(楊洲) 석교원(石橋原)에 임시로 장례를 지냈다. 1506년 목천(木川)의 작성산(鵲城山)에 개장(改葬)했다가 1508년에 현재의 위치인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산110번지에 반장(返葬)을 하였다.

 

후일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 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1518년 청도의 유생들이 김일손이 공부하던 운계 정사 터에 자계사(紫溪祠)를 세웠고, 1661년 사액을 받았다. 1835년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청도의 자계 서원(紫溪書院)과 함양의 청계 서원(淸溪書院), 목천의 도동 서원(道東書院)에 제향 되었다. - 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상동


 

올해는 김일손 선생이 무오사화로 화를 입으신지 520년이 되는 해다. 나는 청도박물관에서 선생이 남기신 유물과 관련지료들을 모아 탁영 선생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진작부터 듣기는 했으나 며칠 전에야 겨우 시간을 내어 박물관을 찾았다.

 

선비의 길을 묻다-탁영 김일손. 여기에는 선생의 종손 김상인 씨가 소장하는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탁영금(濯纓琴)’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거문고로 선생께서 생전에 헌집의 100년 된 오동나무 문짝으로 손수 만들어 즐겨 연주했다고 전해지는데 1988년 보물 제957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 김일손 벼루와 절효선생실기(節孝先生實紀), 증신인지즙서(贈山人智楫序), 증시교지(贈諡敎旨), 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연시홀기(延諡笏記), 자계서원둔전답경자개량등록(紫溪書院屯田沓庚子改良謄錄) 등 다수의 문서와 선생의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옥벼루와 필재당후일기(畢齋堂后日記), 그리고 삼족당선생일고(三足堂先生逸稿) 목판도 전시되고 있다.

 

비록 청도박물관 1층 기획전시관의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각종 영상물과 음향시설·조명이 전시물을 관람하기에 편하게 배치되어 있고, 누구라도 설명문만 보고 나와도 탁영 선생의 일생을 훤히 알 수 있도록 한 기획 의도가 돋보였다. 이번 탁영 김일손 전은 선비의 길을 묻는 현대인에게 충분한 대답을 줄 것이다.

 

이 전시회는 지난 달 19일 개막행사로 시작하여 내년 210(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까지 전시된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매주 월요일과 설·명절은 휴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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