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 불모산(佛母山) 기슭에 자리한 성주사(聖住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며 통일신라의835년(흥덕왕 10) 국사 무염(無染)이 창건한 사찰이다.
성주사는 가야시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인 허씨가 일곱 아들을 입산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는 전설이 담겨있는 불모산(해발 801m)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천 1백여년 전 신라 흥덕왕 때 무렴국사가 왜구를 도력으로 물리치자 왕이 국사로 삼고 논과 노비를 하사하여 절을 세우고(흥덕왕 10년, 835년)성인이 상주하는 곳이라 하여 "성주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왜구를 물리치고 창건한 호국사찰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조선 숙종과 순조연간을 거치면서 재건되었는데 사찰을 재건하기 위하여 쌓아둔 목재를 곰이 나타나 하루 밤 사이에 지금의 성주사 자리로 옮겨 놓았다는 전설이 있어 "웅신사" 또는 "곰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주사는 대웅전, 영산전, 삼신각, 설선당, 안심료등의 당우와 삼층석탑 관음보살입상, 부도군 등의 문화재가 있는데 지방유형문화재 제 134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은 조선 숙종 7년(1681년)에 중건한 맞배지붕으로 전면 포작을 화려하게 조각하였으며, 대웅전 내부에는 화려하고 규모가 큰 닫집을 시설하여 법당내부를 장엄하게 꾸민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성주사 창건 설화"
『성주사사적기』에 따르면, 흥덕왕 때 왜구들이 자주 신라에 출몰하여 피해가 극심하므로 왕이 늘 근심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리산에 있는 무염화상(無染和尙)과 논의하면 물리칠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곧 사자를 보내 이런 사실을 전하자 무염이 신통력으로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무염을 국사로 봉하고 밭 360결(結)과 노비 100호(戶)를 내렸으며 즉시 절을 창건하였는데,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으로 성주사(聖住寺)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르면 성주사는 신라시대인 835년(흥덕왕 10) 무염국사(801~888)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염은 821년(헌덕왕 13) 입당했다가 845년(문성왕 7)에 귀국했으므로 이 창건 설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 진경(眞鏡)이 중건하였으며, 이때 곰이 불사(佛事)를 도와 하룻밤 사이에 목재를 날라주었다고 하여 웅신사(熊神寺)라 하고 그로 인해 곰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성주사 동종 누각
↑ 성주사 동종
이 종은 1783년에 제작된 높이 111cm,직경84cm,무게600근의 조선시대 종이다. 용뉴부에 음통은 없고 쌍용으로 용뉴를 장식하였다. 종신 가운데에는 4개의 유곽이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사이에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흔히 타종 부분으로 대칭적으로 새겨지는 당좌가 종에는 없다.전체적으로 문양의 조각 수법은 조잡하고 표면은 거칠지만 조선시대 동종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서의 가치가 있다.
↑ 성주사 동종에 대한 안내문
↑ 대웅전/보물 제1729호인 창원 성주사 목조 석가여래 삼불 좌상이 모셔진 대웅전
조선후기에 중건된 성주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앞뒷면에만 공포를 짜 올리고 옆면에서는 생략하였다.
공포는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뒷면 내부의 공포만 간략한 교두형(翹頭形: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성인이 상주하는 절이란 뜻을 지닌 이 절은 835년(흥덕왕 10)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그의 도력(道力)으로 왜구를 물리친 덕분에 왕이 그를 왕사(王師)로 삼고 절을 창건하게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681년(숙종 7)에 중건하였고, 다시 1817년(순조 17)에 중수하였다. 한편, 중건할 때 곰이 목재를 운반하였다고 하여 곰절[熊神寺]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 대웅전의 옆 모습
↑ 성주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높이 3.1m.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2중 기단을 가진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완성된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형식으로 현재 하대 갑석(甲石) 아래 부분은 없어졌다.
현재 서북편 사지에 석탑 받침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탑은 지금의 절에서 500m 정도 되는 서북편에 있는 창건 당시의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탑재를 옮겨와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사적기(寺蹟記)」에도 신라 흥덕왕 때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중건할 당시 석탑과 석등을 찾아냈다는 기록이 있어 절을 중건하면서 옛 절터에 있던 석탑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중기단의 상층기단 각 면석(面石)에는 2개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중앙에 탱주(撐柱 : 받침기둥)를 새겼다. 기단의 상대 갑석은 경사가 거의 없는 평면으로, 중앙에 사각형의 얕은 탑신괴임을 올려놓았다. 초층탑신에는 간략하게 문비(門扉: 문짝)를 새겼는데, 특이하게도 문비가 벽면의 상인방과 하인방 중간에 마련되어 있다. 14ㅐ의 돌로 만든 옥개석은 탑신 괴임을 생략하고 간략하게 처리했다.
옥개석은 추녀 밑은 수평이고 받침수는 각 층 4단씩이다. 옥개석 처마의 아랫선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윗선은 양쪽 귀퉁이가 크게 휘어올라갔다. 상륜부(相輪部)의 탑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3층옥개석 위에 놓인 보주형 석재는 본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과 석등을 놓았던 대석(臺石)이 묻혀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가 섬약하나, 간결하고 소박한 멋을 풍기는 우수한 석탑이다. 탑의 조성시기는 보타전(寶陀殿)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관세음보살상과 더불어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 영산전
석조 석가삼존 십육나한상이 모셔져 있으며 대웅전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 설법전과 대웅전
↑ 향적당/공양관
↑ 지장전 좌측에 자리한 향적당
↑ 성주사 지장전
탑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지장전이다.
↑ 진신사리탑과 지장전 뒤로 불모산이 우뚝 서 있다.
↑ 진신사리탑
↑ 진신사리탑에대한설명문
↑ 석등과 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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